야한 영화 기대했던 고교생 ‘지질한 리얼리즘’에 눈뜨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아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사실 그는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했다. 영화과가 있다는 것도 대학 원서를 쓸 무렵 전공 안내 책자를 펴 보고서야 알았다. 그런 그가 영화과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왠지 공부 안 하고 놀 수 있을 거 같아서’였고, 무엇보다 ‘예쁜 여자가 많을 거 같아서’였다. 게다가 당시 영화과 연출전공은 다른 예체능 계열 학과와 달리 실기시험이 없었다. 수능 성적만 좋으면 특차로 입학할 수 있었다.
경찰서장이던 아버지는 “남자 직업 중 최고는 검사”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집안 사정으로 경찰관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던 미련과 나이 어린 검사에게 굴욕을 당했던 직업상의 한이 결합된 강요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명문대 법대에 보내겠다며 매일 영어 단어 100개씩을 외우게 하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30분씩 단어 시험을 보게 했다. 단어를 못 외우면 골프채나 주먹이 날아왔다. 그런 아버지는 아들이 고3이 되던 해 식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입원해 있었다. 진심이든 장난이든, 아들의 선택을 반대할 이는 없었다. 그렇게 윤종빈은 영화과 학생이 됐다. 그때 그는 안내 책자 한 번 펴 보고 제비 뽑듯 뽑은 영화과가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윤종빈이 고교 시절을 보낸 부산 동래구 안락동에서 극장이 몰려 있는 중구 남포동까지 가는 데는 1시간이 걸렸다. 영화에 애정이 있다면 문제가 될 것도 없을 거리였다. 그러나 그에게 영화는 1시간이나 이동 시간을 투자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각인된 영화의 이미지는 하나였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영화에서나 가능한 장면들을 늘어놓는 것.’ 중고교 시절 그도 친구들과 어울려 홍콩 영화를 보곤 했다. 물론 비디오였다. ‘영웅본색’, ‘도신-정전자’ 같은 영화를 신나게 보다가도 늘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총탄도 피하는 영웅과 멋진 영웅의 손에 죽어 나가는 수십 명의 악당들. 이게 말이 돼?’ 코웃음을 쳤다. “예민하던 시기였거든요. 예민함을 자극하기에 영화는 뭔가 한참 부족했어요. 오락 이상의 감흥이 없었죠.”
생각에 작게나마 변화가 생긴 건 1996년의 어느 날이었다. 고2였던 그는 야한 비디오를 빌려 볼 생각으로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갔다. 곧 자극적인 문구를 단 테이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라스베가스 창녀, 죽기 위해 마셔대는 알코올 중독자….’ 창녀, 더할 나위 없이 ‘야한’ 단어였다.
“이 느낌은 뭐지. 왜 이렇게 이상하지….” 영화가 끝난 뒤 처음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영화에서는 ‘현실에 꼭 있을 법한’ 인물들이 나와 영화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현실적인’ 장면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으로 비틀거리며 술값을 빌리러 다니는 벤, 반짝거리는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몸을 파는 세라. 꾸밈없는 장면들과 멋지지 않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현실은 정교한 묘사가 보태진 채 영화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영화가 이럴 수도 있구나….” 야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영화의 야하지 않은 잔상이 꽤나 오래 남았다.
영화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바뀔 만큼의 큰 파동을 느낀 건 영화과에 입학한 직후였다. 영화과에는 사실 전문가 수준의 마니아들이 입학한다는 걸 알고 놀라 영화를 벼락치기로 공부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라.” 1996년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이었다.
그는 당시 중앙대 영화과가 있던 안성캠퍼스 인근 자취방에서 다시 비디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충격적인 영상이 덤덤하게 쏟아졌다. 주인공인 무명 소설가 김효섭의 모습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런 면이 있기 마련이지’라고 그가 막연하게 떠올리던 생각의 단편들이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려져 정밀하게 묘사돼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지질한’ 모습과 심리를 감독은 일상의 시선으로, 누구보다 세밀하게 담아냈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구체적인 영상이 돼서 나오는데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사실적으로 인간과 세상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죠.” 20번 넘게 반복해 보면서도 매번 감탄했다. 처음으로 진정 영화를 좋아하게 된 순간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위기를 느낀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였다. 아버지는 그가 영화과 2학년이던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 위기는 2002년 1월 군을 제대한 뒤 ‘실체’가 되어 다가왔다. 막막했다. 집에 돈 버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혹독했지만 경제적으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게 해준 아버지가 없다는 공허함이 함께 다가왔다. 하루라도 빨리 영화감독이 돼 자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압박감에 한창 시달리고 있을 때 졸업 작품을 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주제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군대 이야기. 복학 후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데 도저히 군대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군대에 가기 전과 확실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논리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곧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도 이제는 삶의 여러 가지를 잘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포함한 거의 모든 예비역 복학생들은 군대 이야기를 쉽게 하면서도, 군대에서 왜 사람이 변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듯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동안 한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을 묘사해 보자. 최대한 세밀하게.’
제작비가 필요했다. 때마침 한국코닥과 씨네21이 공동으로 단편영화 지원 프로젝트를 한다고 했다. 최종 선발되면 2000만 원의 지원금이 나온다고 했다. 단편 ‘용서받지 못한 자’ 시나리오는 생각보다 쉽게 완성됐다. 공수부대에서 복무하며 겪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꼼꼼하게 담아내면 됐다. 결과는 최종 단계에서 탈락,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좌절감이 컸다. 그러나 지원금이 3000만 원인 장편영화 지원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곧 기운을 차렸다. 30페이지인 시나리오를 70페이지로 늘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옥 같았던 군 생활을 다 묘사하려면 100페이지도 부족했다. 그런데 또 떨어져 버렸다. 스물네 살의 패기만만했던 감독 지망생은 또 한 번 좌절했다.
마지막 끈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시나리오를 줄여 영화진흥위원회 단편영화 제작 지원 프로젝트에 응모했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지원금 700만 원이 들어왔다. 그런데 영화를 단편으로 만들려고 보니 아까웠다. 누군가의 인생과 성격을 완전히 바꿔 버리기도 하는 군대 이야기를 단편에 담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700만 원에 여기저기서 끌어온 돈을 보태 2000만 원을 만들어 2시간짜리 장편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군 문화를 부정했지만 진급을 하면서 결국 그토록 싫어하던 고참들의 모습을 닮아가는 군인의 이야기를 영화 속에서 담담히 그려냈다.
윤종빈은 당시 그 영화가 이제 막 스물여섯이 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주목받게 할, 대단한 작품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가 솜씨 좋게 만들어낸 ‘용서받지 못한 자’는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에 올랐다.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도 초청됐다. 영화계의 시선이 집중됐다. 찬사가 쏟아졌다. “주목할 만한 신인이 나타났다. 제작비 2000만 원을 들여 만든 영화 속 군대가 현실의 군대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때 단편 시나리오 공모에 합격해 그냥 단편 졸업 작품으로 만들고 말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당장은 떨어져서 좌절했지만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영화 세공술사
‘용서받지 못한 자’가 세상에 알려진 2005년 이후 그가 세상에 내놓은 영화는 단 2편뿐이다. 2008년에는 ‘비스티 보이즈’(관객 72만 명)를 극장에 올렸다. 강남 호스트바와 그곳에서 남성 접대부로 일하며 허상을 쫓는 젊은이들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해 강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지난해에는 혼란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살아가는 건달도, 공무원도, 사업가도 아닌 인물 최익현의 모습을 담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내놨다. 관객들은 당시 서른세 살에 불과했던 젊은 감독의 나이답지 않은 묵직한 존재감을 느꼈다. 그가 손을 대기만 하면 영화 속 현실과 인물이 실감나게 살아 움직인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현대 사회의 풍경과 그 속의 인물들을 윤종빈만큼 잘 세공하는 이도 없다”는 평가도 나왔다. 윤종빈이 만들어낸, 영화 속 건달 최형배의 대사 “살아있네”는 국민 유행어가 됐다. 470만 명이 극장을 찾았다. 더불어 ‘윤종빈식 세상·인물 들여다보기’도 확실한 인정을 받았다.
가장 주목받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이지만 정작 그는 앞으로 어떤 주제의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계획이 없다. 거창한 장기 계획은 비현실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흐름’ 같은 것은 있다. “가장 현실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등장하고, 그래서 공감을 끌어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영화가 탄생한 지 100년이 지났어요. 이미 나올 수 있는 주제,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다 영화화됐다고 봐야죠. 결국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는 영화를 새롭게 보이게 하는 건 현실과 인물에 대한 ‘디테일’이에요. 현실과 인물의 면면을 가장 정밀하게 포착하고 묘사해 담아내는 것, 그게 차별성이죠.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묘사하다 보면 관객도 더 많이 공감하지 않을까요?”
▼ 윤종빈 영화의 모티브는 ‘체험담’ ▼
■ 공부 압박했던 부친, 아침마다 영어 시험… 건달 최익현이 재연
윤종빈의 영화에서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세상과 들었던 이야기들, 겪어온 인물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비스티보이즈’에는 윤종빈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유명 호텔에서 결혼식 비디오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봤던 세상이 담겨 있다. 2002년 제대한 뒤 대학 3학년에 복학한 그는 단편영화 제작비를 벌어 보려고 6mm 카메라를 들고 1년간 주말마다 호텔 예식장에서 일했다. 하루 종일 비디오를 찍고 지친 저녁, 호텔 밖으로 나와 보면 또래의 남성들이 고급 외제차를 몰고 주변을 오갔다. “저들은 누구일까. 분명 내 주변엔 저런 사람들이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호텔 뒷골목에 있는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남성 접대부들이었다. 그는 비스티보이즈를 제작하기 전 호스트바에 웨이터로 위장취업해 한 달 반 동안 남성 접대부들의 생활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영화 속 배우들이 외치는 “살아있네!”라는 대사는 그와 친구들이 학창시절 습관처럼 쓰던 말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강제로 하는 ‘야간자율학습’이 싫어 늘 도망쳤다. 도망친 뒤에는 동네 친구들과 당구장, 노래방을 다니며 노래를 잘해도 “살아있네!”, 당구를 잘 쳐도 “살아있네!”를 외쳤다. 그것은 어디든 적용되는 호환성 좋은 그들만의 유행어이자 추임새였다. 극 중 주인공 최익현(최민식 분)이 아침식사를 하는 식탁에서 아들에게 영어단어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 똑같이 겪었던 일이었다. 윤종빈은 “중 2때 아버지가 경남지역의 경찰서장으로 발령난 뒤에는 전화로 단어 시험을 봤다. 이 덕분에 커닝을 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최익현을 세관공무원으로 설정한 데는 중학교 시절 들었던 친구 아버지 이야기의 영향이 컸다. 친구는 자기 아버지가 한때 세관공무원으로 일했다며 “아버지가 집에 들어와서 잠바를 열어젖히면 돈하고 온갖 귀금속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고 말하곤 했다. 극 중 조범석 검사(곽도원 분)는 어린 시절 경찰이던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경찰이 본 검사의 이미지를 일부 반영해 만들어낸 인물이다. 윤종빈은 “특정 검사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있던 검사의 이미지를 영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간에선 최익현도 검찰 브로커로 유명했던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