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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국가통합 업적 이룬 여성지도자 원조들

입력 | 2013-03-02 03:00:00

“신대륙 탄압 말라… 그들도 내 백성” 스페인 이사벨라, 콜럼버스 수감




이사벨라 여왕. 청아출판사 제공

“…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안방으로부터 튀어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잡아 일으켜 임금 자리에 앉게 하였다. 참말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것이 다행이었다.”

이 구절은 고려시대 김부식이 삼국사기 ‘선덕여왕’ 편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주석으로 달아 놓은 것이다. 여왕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엄격한 유학자였던 김부식만의 독특한 견해도 아니었으며 유교적 전통이 강한 동양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유럽에서 여왕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가 성숙해갈 무렵인 15세기 후반이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연이어 등장해 조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성별은 통치력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이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는 이사벨라 여왕은 현재의 스페인 왕국을 만든 사람이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에스파냐 사람(Espa~nol)’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이사벨라의 시대에 스페인 남부는 80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북부의 바스크 지역도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바르셀로나는 독립국이었다. 그 나머지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동서로 양분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작고 혼란스러운 카스티야 왕국에서 이복 오빠인 엔리케 4세와 정치적 타협으로 내전을 끝내고 왕위계승권을 확보했다. 엔리케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이사벨라가 왕국의 유력한 왕위계승자이었기 때문에 여섯 살 무렵부터 청혼자들이 줄을 섰다. 하지만 그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계승자인 페르난도 왕자에게 구혼함으로써 스스로 정략결혼을 선택했다.

이사벨라는 집권 초기부터 심각한 내우외환을 극복해야 했다. 왕권은 약화되고 이미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해 있던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았다. 이사벨라는 포르투갈과 싸워 승리한 뒤 귀족들을 굴복시켜 조세징수권, 화폐발행권, 지방관리 임명권을 되찾아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는 의회를 무시하고 무력시위도 불사했지만 국민들과 직접 접촉해 그들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얻는 방법으로 기득권의 저항을 이길 수 있었다.

대략 10년에 걸쳐 왕권을 강화하며 자신감을 얻은 그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를 선언했다. 이는 ‘재정복’이라는 의미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완전히 몰아내는 작업이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은 7년에 걸친 긴 전쟁을 통해 재정복에 성공했으며 민족적인 일체감을 되찾았다. 공식적인 왕국의 통합은 이사벨라의 다음 세대에 이뤄졌지만 이때부터 그들은 스스로를 ‘에스파냐 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고대 로마시대의 지명인 ‘이스파니아(Hispania)’에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레콘키스타’와 함께 이사벨라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을 내주어 신대륙을 개척하게 한 것이다. 이 항해를 계기로 스페인은 급격히 부유해졌고, 그의 말년에 이미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이사벨라는 부정적인 유산도 남겼다.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한 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추방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종교재판(Inquisition)’이 시작됐다. 이는 유별나게 독실한 그의 가톨릭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자신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의 신임을 받기 위해 주변인들이 경쟁적으로 이교도에 대한 탄압에 앞장선 것이다.

이사벨라는 종교적 탄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예가 콜럼버스와의 일화다. 초대 서인도제도 총독으로 임명된 콜럼버스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원주민들을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이 보고를 받은 이사벨라는 즉각 콜럼버스를 체포해 송환한 다음 감옥에 집어넣었다. “인디오들도 모두 나의 백성이며 고귀한 신의 피조물이라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정의와 공정성이 행해지기를 바랍니다.”

이사벨라는 죽을 때까지 콜럼버스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여왕의 사후에야 페르난도에 의해 석방됐다.

엘리자베스 1세. 청아출판사 제공

▼ 인재발탁 탁월한 엘리자베스1세… 말타고 전국 돌며 대중과 소통 ▼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타고난 천재였다. 일곱 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는데 모두 열 살 무렵 마스터했다고 한다. 그는 초기 잉글랜드 르네상스 문학의 선구자였다. ‘엘리자베스 튜더’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여러 권 출간했고, 당시 문화 선진국이던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작품들도 영어로 번역해 냈다.

문학적 재능보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었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윌리엄 세실 경은 원래 정치적으로 반(反)튜더, 반엘리자베스 진영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일찌감치 참모로 발탁되더니 24년 동안은 정치고문으로, 그 후 26년 동안은 재무상으로 봉직했다. 여왕이 신교도 망명자 출신의 신참 하원의원 프랜시스 월싱엄을 참모로 발탁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를 ‘현대 첩보전의 창시자’로 높이 평가한다.

여왕은 41세 생일 즈음에 유명한 해적인 존 호킨스를 왕립해군의 준제독(Rear Admiral)에 전격 임명해 해군함정의 건조를 맡겼는데 그는 향후 200년 동안 유럽 각국 해군의 표준이 될 신형 프리깃 전투함을 개발했다.

호킨스를 발탁할 때 정규 해군 출신 인사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게다가 호킨스는 골수 가톨릭 신자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여러 차례 쿠데타나 여왕의 암살을 기도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측근들 중 가톨릭 신자를 제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는 시인답게 멋진 말로 이에 응수했다. “나는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위해 마음의 창을 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사람을 쓸 때 그의 출신이나 과거 행적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그가 일구어 낼 미래만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 기간에 의회도 몇 번 소집하지 않을 정도로 독재자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잘 깨닫지 못했다. 여왕은 말이나 마차를 타고 전국을 돌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대중과의 소통에 의존하는 현대식 정치인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는 구텐베르크가 불과 한 세대 전에 발명한 금속활자를 가장 모범적으로 활용한 프로파간다의 대가이기도 했다. 여기엔 타고난 문학적 재능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는 그의 별명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나 ‘영광의 여인(Gloriana)’도 모두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거나 대영제국을 출범시킨 정치적인 성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사회는 리더의 성향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엘리자베스의 시대는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신라의 선덕, 진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고 이사벨라 1세는 스페인을, 엘리자베스 1세는 대영제국을 설계했다. 물론 역사에는 신라의 진성여왕이나 이집트 왕국의 마지막 통치자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정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2013년 대한민국은 여성 대통령이 통치하는 흔하지 않은 시대를 맞았다. 5년 후, 그리고 후일의 역사는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무척 궁금하다.

김후 ‘불멸의 여인들 역사를 바꾼 가장 뛰어난 여인들의 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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