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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위안부소녀상 앞 ‘봉선화’ 연주…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

입력 | 2013-03-04 03:00:00

“나는 침략자 후예… 3·1절 깊은 아픔으로 보냈습니다”



1970∼1980년대 청계천에서 고 제정구 의원과 빈민구호활동을 펼쳤던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 그는 당시 청계천을 포함해 전국을 다니며 한국과 한국인을 찍었다. 그는 제 의원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면서 “제 의원은 빈민구제를 위해 혼신을 다해 일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 늘 낙관했다. 지금 한국의 모습을 보면 그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야마나시=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 지난달 24일 오후 1시, 일본 도쿄 신주쿠 역에서 야마나시(山梨)현행 급행열차를 탔다.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고부치자와(小淵澤)역. 우리나라 간이역 같은 곳이다.차를 타고 다시 15분 정도 달렸다. 숲속에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82) 목사가 살고 있는 살림집 겸 교회가 있었다. 이곳은 세상과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적막하고 조용했다. 평온한 삶을 살던 노무라 목사는 최근 격랑에 휘말리는 일을 겪었다. 지난해 2월 13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홍난파 ‘봉선화’를 플루트로 연주한 일이었다. 그는 이 일로 “일본인이 소녀상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니, 쇼 아니냐”는 한국 누리꾼의 비난과 “왜 나라 망신을 시키느냐”는 일본 누리꾼의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

기자가 e메일로 인터뷰를 청했을 때 “제발 오지 말아 달라”고 했다. 세상에 약간의 공포심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익 성향 일본인들이 항의 전화를 걸었고, 욕설 e메일도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번 방문은 그가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임정진 아동문학가와 장애인지원전문단체 푸르메재단 백경학 이사가 평소 인연이 있던 그를 위로차 방문한 길이었다. 마침 3·1절을 앞두고 있던 터라 기자도 따라나섰다.

아직도 한밤중에 욕설 전화를 받는다는 그는 “역사를 모르고 세상을 넓게 볼 줄 모르는 가여운 사람들”이라며 “나를 비난했던 일본인들, 자기 식대로 해석을 붙인 한국 젊은이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선 지난해 소녀상 앞 연주이야기부터 했다.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를 기리는 작은 연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마침 1970년대 빈민 활동을 하면서 친하게 지낸 고 제정구 의원 기일(2월 9일)을 맞아 한국에 간 길에 실행에 옮긴 거죠. 지인을 통해 봉선화 악보도 구하고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연주를 마친 후 일본 대사관으로 가서 ‘올바른 한일관계를 위해 애써 달라’고 당부하고 싶었지만 한국과 일본 기자들이 진을 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악감정을 갖는 것을 가장 크게 걱정했다.

지난해 2월 13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연주하는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日과거사’ 미안해하는 일본인이 더 많아

“일본 내에서는 ‘현재 한일관계가 뭔가 비정상적이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진 못했지만, 일본 선조들이 분명 잘못된 일을 저질렀으며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식을 갖춘 일본인이 많습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런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TV에 나오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크고,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소개되고 인터넷에 잘못된 목소리만 나오다 보니 한국인도 일본에 대해 오해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여기에는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고 했다.

“정치인들은 한일 양국 감정을 흔들어 놓곤 합니다. 국내 정치에 대한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에 한일감정만큼 이용하기 좋은 도구가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위정자들의 인형극 줄 같은 끈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는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자 문제에 대해서도 말을 꺼냈다.

“일본인들은 한국이 두 가지 사안을 문제 삼을 때마다 ‘이미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돈을 (줄 만큼) 줬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 한일 양국 간에 시각 차이가 생겼다고 봅니다. 한국 정부도 이 돈을 종잣돈 삼아 경제발전에 썼습니다. 도로도 놓고, 제철소도 세우고… 그러니 한국 정부도 국민에게 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기자를 벽면이 책으로 가득한 책장으로 안내했다. 책장에는 연도별로 정리된 사진집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1968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 청계천을 포함해 전국을 다니며 그가 찍은 한국의 모습들이다. 100권이 훌쩍 넘는 사진집(큰 사진 속)에는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열심히 미래를 개척하는 한국민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1931년 교토에서 태어난 노무라 목사는 도쿄수의축산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성서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기독교와 종교사 등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1961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던 젊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어머니 노무라 가스코 여사(2010년 타계)는 일본 내 소비자운동으로 2005년 노벨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그는 1968년 8월 한국에 첫발을 디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뭔가가 팍 와 닿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이곳에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지요. 어릴 적 고향 교토에서 일본 아이들이 조선 아이들을 보고 ‘조센진’이라 놀리던 모습도 겹쳐졌어요.”

당시 한국에는 서울 남산에 일본 신사 모습이 아직 있을 정도로 곳곳에 일제강점기 때 흔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에 대해 한국인의 시선이 차가울 때였다. 충북 제천에서 만난 한국인 할아버지는 가슴에 생긴 칼자국을 보여주며 “이게 다 너희 일본인들 짓”이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노무라 목사는 자신의 초등학생 두 자녀에게도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주어야겠다는 생각에 1973년,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관광지를 다닌 게 아니라 조선인 학살의 현장인 수원 제암리 교회, 3·1운동이 있었던 탑골공원을 돌아다녔다. 그는 자신이 침략자의 후예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고 한다.

2005년 노무라 목사가 청계천문화관에 기증한 자료 중 일부. 1973년과 1977년 목사가 가족을 데리고 왔을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이 기록한 일기 형식의 스크랩북. 한국에 대한 감상이 어린 소녀의 눈으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양국 정치인들 한일감정 ‘인형의 줄’ 조종


당시 여행은 노무라 목사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곳곳에 가해자 일본의 흔적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속죄하며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 그의 마음을 받아준 한국 교회 관계자들이 청계천 빈민가로 그를 안내했다. 당시 청계천은 6·25전쟁 이후 피란민이 몰리면서 수십만 명이 거주했다. 생활오수가 쏟아지면서 물은 콜타르처럼 검고 찐득거렸고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 아픈 사람도 많았다.

“창문도 없는 방에 열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누워 있었습니다. 방이 너무 좁아 대각선으로 누워야 간신히 누울 수 있을 정도였죠. 아이 옷을 들추니 허벅지에 허연 뼈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아이는 병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에도 못 가고 있었어요. 그 뼈에 벌레가 알을 낳고 얼마 남지 않은 살을 파먹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눈을 잊을 수 없었어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아이는 얼마 뒤 죽었습니다.”

노무라 목사는 굶는 아이들을 위해 급식비를 마련하고 병원에 갈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병원비를 쥐여줬다. 혼자 힘으로 벅차다는 생각에 동분서주했지만 한국의 대형 교회들에서는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무작정 서독으로 날아가 아동구호단체 KNH(킨터노틀페)를 설득했다. 그리고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고 제정구 의원과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제 의원이 한국에서 빈민들을 위한 터전을 일구는 동안 노무라 목사는 서독 호주 일본을 뛰어다니며 자금책 역할을 했다. 그는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자기 자신에게 철두철미했던 제 의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개가 숙여진다”고 했다. 한국에서 만난 빈민활동가들 중엔 순수하지 못했던 사람도 많았다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어렵게 받아 온 기부금을 탁아소를 짓겠다는 한국의 교회 관계자들에게 주고 난 뒤 완공되었다고 가보면 교회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빚을 내 사재를 털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빈민구제사업을 이어갔다.

1978년 경기 남양주 등으로 청계천 빈민들이 이주하자 빈민들과 돈을 합쳐 축산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한다. 돈이 모이자 뉴질랜드 목축업자와 계약을 해 뉴질랜드로 직접 가 우량 소 600마리를 인천항으로 실어 보냈다. 하지만 이 일은 실패했다. 잔금을 갖고 있던 한국인 목사가 돈을 불려보겠다며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땅이 전매제한법에 묶여버린 것. 결국 잔금을 치르지 못한 소들은 인천항에서 하역도 하지 못한 채 절반 이상이 굶어죽었다. 비난의 화살은 노무라 목사에게 쏠렸다. 그는 당시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으로 보낸 돈이 어림잡아 7500만 엔(지금 환율로 약 8억 원)이 넘어요. 결국 모친이 유산으로 남겨준 집을 팔아 빚을 갚고 이곳 산골로 들어왔지요.”

1984년 이후 한국 내 빈민구제활동에는 손을 뗐지만 마음속엔 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기념관이 생긴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갖고 있던 사진과 필름들을 서울역사박물관과 청계천문화관에 기증했다.

속죄 위해 한국서 수십년간 빈민구호 활동

밖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노무라 목사 부부가 바빠졌다. 날이 추워져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여우들에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무라 목사의 집은 유기견 집합소이기도 하다. 목사 집에 버리면 키워준다는 소문이 돌면서 전국에서 유기견들이 보내져 많을 땐 10마리를 한꺼번에 키운 적도 있다.

이튿날인 25일, 노무라 목사 부부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을 NHK 뉴스로 보면서 발전된 서울의 모습이 나오자 자신들의 일인 양 기뻐했다. 26일 오전, 그의 집을 나왔다. 서울로 돌아와 연 e메일에는 그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어제는 3·1독립운동기념일이었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악행에 대해 저는 어제 하루를 깊은 아픔으로 보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기자는 “지난 역사에서 가해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양심적인 일본인이 더 많다”는 그의 말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인터뷰 중에 만났던 그의 아들 마코토 씨 말이 겹쳐졌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한국 여행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에 이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한국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야마나시=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 [채널A 영상]일본 여성들 “위안부 문제 사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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