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後 문학의 살롱시대 열고, 空超는 담배연기처럼 사라졌다
지난달 13일 권영민 교수(왼쪽)와 이근배 시인이 서울 명동의 청동다방 자리(두 사람 뒤편)를 방문했다. 지금은 옷가게로 변한 이곳은 1950년대 공초 오상순을 필두로 한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공초 오상순은 애연가였다. 그래서 그의 오른손에 담배가 쥐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건국대박물관 제공
오상순은 공초(空超)라는 그의 호를 붙여 불러야 더 어울린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신학교를 다녔다. 일찍이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에서 종교 철학을 공부했으며, 1920년 황석우 남궁벽 변영로 염상섭과 문학 동인 ‘폐허’에 참여했다. 한국 문단사의 첫머리에 오르는 ‘폐허’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가로서 명패를 달았지만 그는 문단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한때 불교중앙학림에서 가르쳤고 보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는데, 1926년 부산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입산해 선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그때 이미 속세의 삶을 등졌고 방랑의 객이 되어 전국의 사찰을 떠돌았다. 생전에 혼인하지 않았으니 그 자신에게 딸린 가족이 없었고, 방랑객으로 전국을 떠돌았으니 거처할 집도 없었다. 공초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공초는 떠돌이가 되어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시련을 피했다.
당시 명동은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연극인들이 모여들었고 동방싸롱, 갈채, 청동 같은 다방은 가난한 문학예술인들의 근거지가 됐다. 한국 문학예술의 ‘살롱시대’가 바로 명동에서 펼쳐졌다. 소설가 이봉구의 ‘명동 엘레지’에서부터 명동은 예술의 혼을 낳았고, 사랑과 인생과 예술과 열정과 낭만으로 채워졌다.
공초는 다방을 찾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내밀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게 했다. 그가 이렇게 취미 삼아 모은 청동다방의 ‘낙서첩(落書帖)’은 그대로 한 시대의 귀중한 기록이 됐다. 살아생전에 시집 한 권도 내지 않고 초연했던 그가 청동다방의 낙서첩에 그렇게 열을 올렸던 이유는 알 수 없다. 당시 명동의 청동다방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청동산맥(靑銅山脈)’이라는 이름의 이 낙서첩에 한두 개의 글 구절을 남겼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시인 공초의 이 새로운 사업은 십년의 세월 동안 무려 195권의 청동산맥을 이루었다.
공초의 청동산맥은 해외 문단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분량도 방대하고 그 내용도 다채롭다. 시인 이은상은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라며 헛기침을 했고, 서정주는 ‘안녕하시었는가. 백팔의 번뇌 내 고향의 그리운 벗들’이라고 적었다. 박목월은 ‘우연히 다방에 들러 선생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라고 소박한 인사말을 써넣었다. 당시 문단의 신참에 해당했던 김관식은 ‘슬픔은 차라리 안으로 굳고, 겉으로 피는 자조(自嘲)의 웃음’이라고 시 한 구절을 적었다.
소설가 박경리는 ‘자학(自虐)의 합리화가 종교이며, 자학을 벗어난 경지에서 신이 존재한다’라는 에피그램(경구)을 남겼고, 비평가 이어령도 ‘여기에는 시초(始初)도 종말(終末)도 없다’고 적었다. 고은은 담배를 물고 살아서 ‘꽁초’로도 불렸던 공초를 향해 ‘담배의 공복(空腹)이란 건 더 야릇할 거예요’라고 낙서했다.
청동다방의 낙서첩 ‘청동산맥’. 건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건국대박물관 제공
지난달 13일 이근배 시인과 함께 번잡한 명동 거리를 걸으며 청동다방의 흔적을 찾았다. 다방이 있던 자리는 형형색색의 여성복이 전시된 옷가게로 바뀌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한국인도, 외국 관광객들도 여기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적 성소라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봄은 동방에서 꽃수레를 타고 온다는데 가을은 지금 머언 사방에서 내 파이프의 연기를 타고 온다’라고 썼던 공초는 1963년 세상을 떠났다. 벌써 50년이 흘렀다. 하지만 명동 어디선가 예의 그 뿌연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공초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