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대통령-野 정부조직법 충돌에 정치권 안팎 우려 목소리
결연한 표정-손동작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 위해 단호한 표정으로 청와대 춘추관에 들어서고 있다(왼쪽). 박 대통령은 이날 오른손 주먹을 쥐어 보이거나, 두 손을 합장하거나, 손바닥을 마주 들어 보이는 등 다양한 손동작(오른쪽 위부터)을 크게 취하며 정부조직법 개정안 통과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계속되는 글로벌 경제위기, 북한 핵실험 사태 등으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는 상황이지만 2013년 3월 한국 정치는 세계 11위 경제 대국에 걸맞은 최소한의 리더십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조직법 개정 협상을 놓고 청와대와 야권이 상대방에게 굴복만을 요구하며 스스럼없이 정치적 민낯을 드러내고 있는 현 상황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선 전후 ‘100% 대한민국’을 주창하며 대통합을 내건 박 대통령이 새 정부의 아이콘인 미래창조과학부의 출범을 위해 야당 의견을 얼마나 수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2일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일방적으로 여야 회담을 제안한 데 이어 4일 대국민담화에서 야당을 사실상 ‘국정 방해 세력’으로 규정하며 정부조직법 개정과 관련해 야당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핵심이 빠진 미래부는 껍데기만 남는 것이고 (야당 주장대로라면) 굳이 미래부를 만들 필요가 없다”며 배수진을 친 것.
박 대통령의 격앙된 대국민담화에 더 놀란 쪽은 새누리당이다. “대통령이 야당을 이렇게 비판하면 우리가 어떻게 야당과 협상을 하느냐”는 분위기다. 친박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 담화 내용과 형식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황우여 대표, 이한구 원내대표 등 여당 지도부는 사실상 박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는 형국이다. “여당에 협상 재량권이 없다”는 민주통합당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도 마땅치 않게 됐다.
이날 담화 후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옛 친이계인 조해진 의원은 “결의에 찬 대통령의 담화가 국민 여론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지만 매사를 이렇게 풀어갈 수는 없다. 통치의 시대는 갔고 정치만 가능한 시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동료 의원들의 반박은 없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으로 인사차 찾아온 정홍원 국무총리를 만나 “연설을 단호하고 확실하게 잘했다. 대통령에게는 그런 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여권 내에 이런 의견은 소수였다. 민주당에서는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입법부를 시녀로 아느냐”며 반박했지만 박 대통령 담화의 강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각계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박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대통합의 취지를 살려 ‘협치(協治)’의 거버넌스를 발휘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박 대통령이 1997년 정치 입문 후 줄곧 야당의 처지에서 정치를 해왔고 이명박 정부에서도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했지만 이젠 대여 투쟁형 정치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처지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박 대통령은 야권에 있을 때도 한번 결정한 것은 바꾸지 않았다. 2005년 국회에서 사립학교법 처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 대표적”이라며 “당분간 국민을 볼모로 하는 대치 정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새누리당이 자율성을 갖고 일정 정도 타협을 해야 정치력이 발휘되는데 박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하니 답이 안 나오고 있다”며 “여당은 야당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해 정치력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다.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원책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정치력이 실종된 상황”이라며 “야당은 비대위원장이 힘을 못 갖고 있고 여당도 청와대 눈치를 봐야 하니까 힘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