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광해-왕이 된 남자’ ★★★☆
원작 영화와 차별화 전략을 통해 레퍼토리 공연의 가능성을 보여준 연극 ‘광해, 왕이 된남자’. 비천한 광대 출신으로 가짜 왕 노릇을 하다 진정한 왕도에 눈을 뜨는 하선(김도현)이 결코 가까이 해선 안 될 중전(김화영)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교교한 달빛 아래 넉살 좋게 풀어놓고 있다. 비에이치엔터테인먼트 제공
연극은 우선 영화의 풍성한 에피소드를 덜어냈다. 하선이 양반의 매타작에 15세 기생 수청을 주선한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동갑내기 궁녀 사월이를 아끼게 된 사연, 고지식한 호위무사 도부장이 하선의 정체를 뒤늦게 알게 되는 과정, 광해의 정적인 이조판서 박충서가 미인계를 써 광해의 암살을 기도하는 이야기는 사라졌다.
극중 캐릭터도 역사적 사실에 더 충실하게 바뀌었다. 폭군으로서 광해의 면모가 더욱 뚜렷해졌다. 영화에선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중시하는 노론의 영수로 나왔던 박충서가 광해의 폭주에 일정 책임을 진 대북파의 수장으로 바뀌었다. 의식을 잃은 광해 대신 하선을 내세워 꼭두각시놀음을 벌이는 도승지 허균(박호산, 김대종)이 당시 집권세력인 대북파에 의해 숙청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맞게 극의 결말도 바뀌었다. 하선의 진심에 감화된 허균이 광해를 제거할 역모를 기도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너도 결국 나처럼 되는 것이다. 중전이 말하지 않더냐. ‘몇 년 전의 전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그래, 맞다. 너는 내 과거고, 나는 네 미래다. 중전의 웃음도 내가 아닌 너로 인해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어디 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봐라. 결국 너는 네 안의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권력의 속성을 명쾌히 꿰뚫는 이 대사를 기점으로 연극은 영화와 차별화되는 결말로 치닫는다. 연극 ‘광해’는 영상작품을 무대화할 때마다 반복되던 ‘영상 따라잡기’를 과감히 포기하고 무대에 맞는 새로운 구성을 창조하는 지혜를 보여줬다. 그런 점에서 각색과 연출을 맡은 성재준의 재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영화와 차별화 전략은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 하선의 궁궐 생활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영화의 것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연극적 변용을 못 보여줬다. 유일한 예외라면 허균이 하선에게 조정 대신의 면면을 알려줄 때 해당 배우들을 모두 등장시켜 놓고 하선이 헷갈리도록 마구 뒤섞어 웃음을 유발한 정도다.
하선이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는 과정을 연극적으로 펼쳐내는 구성도 부실했다. 후반부 하선의 분노가 폭발하는 어전회의 장면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기득권 수호에만 골몰하는 신료들의 백태를 보여주는 대조적 어전회의 장면이 필요한데 생략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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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3만5000∼5만 원. 02-3014-2118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