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제인 에어(Jane Eyre)’가 1847년에 커러 벨의 작품으로 출간되었을 때 한 남성 비평가는 “이 소설은 남성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남성적 박력이 넘친다”면서 극찬하는 서평을 기고했다. 그 후 작품이 크게 히트하면서 저자가 여성임이 밝혀지자 이 평자는 익명으로 “아주 형편없는 작품”이라는 또 하나의 서평을 발표했다.
오늘날엔 ‘제인 에어’를 소녀 취향 작품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주된 이유는 ‘바이런적인 인물(Byronic hero)’인 남자 주인공 로체스터 때문이다. 영국 낭만주의 대표 시인 바이런이 그 전형으로 여겨지는 바이런적 인물은 무언지 말 못할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어떤 쓰라린 경험 때문에 세상에 환멸을 느껴 인간사회를 경멸하고 혐오하는 캐릭터를 의미한다. 여성의 신비감과 외경심과 모성애를 자극하는 인간상이다.
그러나 속악(俗惡)한 세상을 경멸하고 제인의 순결한 마음을 사랑하는 로체스터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트로피로 소유하고 싶은 남성의 욕망까지는 벗지 못했다. 그래서 제인을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해서 신데렐라로 만들려고 한다. 거기에는 가난했던 제인을 호사시켜 주고 싶은 따듯한 마음보다 자기가 선택한 고아 소녀를 세상이 공주로 경배하게 만들고 싶은 허영심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제인은 이에 결사적으로 저항해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 낸다.
로체스터의 카리스마는 사춘기 소녀 독자에게는 막강한 흡인력을 가진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더욱이 남녀가 더는 서로에게 신비한 존재가 아닌 오늘날에는 그리 쉽게 빨려들지 않는 캐릭터다. 하지만 좀 더 원숙한 눈으로 ‘제인 에어’를 읽으면 문장마다 작가에게 경탄하게 된다. 그토록 척박한 삶을 살고, 운명의 혜택을 하나도 못 받았던 한 젊은 여성의 사고와 감정의 깊이, 도덕적 확고함이 진정 놀랍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제인 에어’는 여성주의 비평가들에게서 심한 비난을 받았다. 로체스터가 정신병자인 버사를 저택의 3층에 감금한 것은 여성 착취이며 학대이고 작가가 이를 묵인했다는 이유다. 진 리스라는 서인도 제도 출신 여성 작가는 버사의 처지에서 로체스터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자기 인생을 서술한 ‘광활한 사가소 바다(The Wide Sargasso Sea)’라는 책을 저술할 정도였다.
하지만 리스의 작품 속 로체스터는 브론테 소설 속의 로체스터와는 다른 인물이다. ‘제인 에어’의 내적 논리로 보자면 로체스터가 첫 번째 아내 버사를 ‘학대’한 것은 아니다. 로체스터의 아버지가 상속받을 재산이 없는 둘째 아들을 서인도 제도의 친구 집에 보낸 것은 물론 부유한 농장주의 딸과 결혼해서 가난을 면하게 하려는 계략에서였지만 순진한 청년이던 로체스터는 미모의 글래머인 버사에게 반해서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곧 음탕하고 포악한 버사의 성격 때문에 그녀를 혐오하게 된다. 그러나 형이 죽어서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한 후에 정신병이 발작한 버사를 손필드로 데려 와서 가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가혹한 조처는 아니었다.
한편 미친 여자 버사가 제인 마음 속의 억눌린 욕망과 광기를 상징한다는 분석은 이제는 정설이 됐다. 물론 이런 주장은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견해이지만 심리학적으로 강한 설득력이 있다. 버사는 제인에게 통제되지 않은 성적 에너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 주고, 또한 상징적으로 대리 분출을 해 준다.
인물도 없고 체격도 왜소하고 존재감도 미미한 제인은 작가 샬럿 브론테의 무력감을 반영한다. 그러나 제인은 거대한 이기심과 부패의 덩어리인 세상과 맨몸으로 대결해서 자신의 도덕성과 소신을 지켜 낸다. 이 장엄한 대결을 독자는 경외의 마음으로 지켜본다.
● 제인 에어 줄거리는
제인은 이곳 주인인 로체스터가 후견하는 아델을 가르친다. 아델은 총명하지는 않지만 제인을 잘 따르고 제인도 성실히 가르친다. 다만 저택에서는 가끔씩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등 불가사의한 점이 많다.
로체스터는 이웃 귀족의 딸을 신붓감이라며 집에 데려오거나 손금 보는 집시 노파로 변장하고 제인의 마음을 떠보는 등 짓궂은 구애를 즐기다가 결국 그녀에게 청혼한다. 로체스터를 간절히 사랑하게 된 제인은 청혼을 수락한다.
하지만 둘의 결혼식에서 로체스터가 기혼이며 그의 정신병자 아내 버사가 저택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로체스터는 순진한 청년 시절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인도 제도로 가서 대농장주의 딸인 버사와 결혼했다. 곧 버사가 음탕하고 사나운 여인임을 알고 운명을 저주하지만 정신병이 발병한 그녀를 그냥 버릴 수 없어서 영국으로 데려와 장원의 3층에 감금해 둔 것이다.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자기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지만 제인은 ‘하느님과 인간 앞에 떳떳지 못한’ 관계를 거부하고 그에게서 도망친다. 얼마 안 되는 노자(路資)도 잃어버리고 굶으며 헤매던 제인은 무어 하우스의 목사관 앞에 쓰러진다. 목사와 누이들은 제인을 극진히 간호해서 살려내고 목사인 세인트 존은 제인에게 자신과 인도 선교를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제인은 어느 날 밤 로체스터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환청을 경험하고 다시 손필드로 달려간다. 손필드에 도착한 제인은 버사가 불을 질러 폐허가 된 저택을 목격하고, 버사가 화재 속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제인은 화재 속에서 아내를 구하려다가 한쪽 팔과 시력을 잃어버린 로체스터와 재회한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제인은 로체스터의 눈과 팔이 되어 행복을 찾는다.
※다음 주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