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이 400개 업무-3000명 관리… 격무 스트레스에 이 다 빠져
《 주민센터 사회복지사이던 서른두 살의 예비신부가 지난달 26일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성악을 전공해 독일 유학까지 다녀오고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며 사회복지사의 길을 택한 이 여성이 1년도 안 돼 “근무하기 힘들다”는 유서를 쓰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회복지사는 마치 말초신경처럼 최일선 현장을 누비며 복지정책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이렇게 최전선에서 뛰는 복지사들이 벼랑 끝에 놓여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아무리 복지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어도 성공하기 힘들다. 동아일보는 2회에 걸쳐 사회복지사의 열악한 실태와 대안을 점검한다. 》
6일 서울 노원구 하계1동 주민센터에서 김학기 주민생활지원팀장(오른쪽)이 센터를 방문한 민원인과 상담을 하고 있다. 김 팀장은 “사회복지 공무원들이 민원인을 상대하며 느끼는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어르신, 어제도 쌀 드렸잖아요. 남은 건 다른 분들도 좀 드려야 하니 이해해 주세요.”
A 씨에게 시달리는 동안에도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5시간 동안 30여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날은 취약계층에게 국내 여행비를 지원하는 여행바우처 신청 첫날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만든 복지사업이지만 주민의 생활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전산망이 주민센터에 있다 보니 김 팀장에게 업무가 넘어왔다. 여행바우처 서류를 작성하려는 민원인이 이날 하루만 44명 다녀갔다.
사회복지사인 주민센터 사회복지 공무원들이 처리하는 복지 업무는 400가지가 넘는다. 시청이나 구청에서 내려오는 업무는 물론이고 교육청, 정부 부처나 유관 기관에서 내놓는 대부분의 복지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김 팀장을 포함해 직원 8명이 기초수급권자 2456명과 영유아 보육료 지원 대상 691명의 업무를 처리한다. 홀몸노인 현황 조사 등 각종 현황 파악업무도 사회복지사의 몫이다. 김 팀장은 “정부가 새 복지정책을 내놓는다는 보도를 보면 기대가 되기보단 겁부터 난다”고 했다.
이곳 사회복지사 8명 중 4명은 이날도 점심을 걸렀다. 4명만 운 좋게 20분씩 교대로 먹고 돌아왔다. 당장 영유아 보육료 지원, 저소득층 자녀 학비 지원 등의 업무가 눈앞에 쌓여 있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김 팀장은 “업무야 밤 새워서라도 어떻게든 끝내지만 민원인을 상대하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대개 혜택을 기대하며 사회복지 공무원을 만나러 온다. ‘안 된다’라는 말을 들으면 행패를 부리는 것은 다반사다. 지원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 주민들이 ‘옆집에선 인터넷 통신비를 지원받는다는데 우리 집은 왜 안 해 주느냐’, ‘몸이 아프니 빨리 치료비를 달라’며 억지 주장을 펴도 몇 시간이고 말로 타이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김 팀장은 이날도 오후 10시가 넘어 퇴근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업무가 많지만 다음 날 오전 7시에 출근해 처리할 계획이다. 김 팀장은 “우리 집 가정 복지는 책임 못 지면서 남의 복지를 챙기는 게 우리 일”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4일 서울 구로구 구로동 ‘구로파랑새나눔터 지역아동센터’에서 오후 외근을 마친 성태숙 씨(가운데)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이 방치되지 않도록 사회복지사들은 학교가 쉬는 휴일에도 일을 한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4일 오후 서울 구로동 ‘구로파랑새나눔터 지역아동센터’ 교실에선 어린이와 정신장애 고교생 등 20여 명이 소란스럽게 뛰어놀고 있었다. 사회복지사 2명이 아이들 뒤를 쫓아다니며 널브러진 장난감과 컵을 치웠다. 교사용 책상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이곳 사회복지사들은 오전 7시부터 서류 작업을 하고 외근과 내근을 반복하다 오후 10시가 넘어 퇴근한다.
성 씨는 오전 7시부터 두 아들 등교 준비를 시키면서 센터의 서류 작업을 한다. 집에서부터 복지사로서의 일과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정식 일과가 시작되면 센터에 맡겨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담임교사와 면담을 하거나 후원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오후 늦게 센터로 돌아와 방과 후 센터를 찾은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새 저녁.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와 면담을 하거나 문서 작업을 마치고 나면 오후 10시가 넘는다. 모든 활동은 서류로 남겨야만 정부로부터 정상 업무로 인정받는다.
학교에 주 5일제가 도입되면서 민간 아동센터 복지사의 삶은 더 척박해졌다. 맞벌이 가정 자녀가 방치되지 않도록 하려면 주말에도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휴일이나 명절에도 쉬기 어렵지만 휴일 수당은 하루 1만 원이다. 성 씨는 “급여로만 따지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봉사정신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학교 측에서 부적응 아동들을 맡아 달라는 요청도 많이 해 온다. 봉사가 당연시되는 기관이다 보니 그런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다.
40대 후반인 성 씨는 격무 스트레스로 이가 많이 빠져 벌써 틀니를 하고 있다. 성 씨는 “내 몸이 내 몸뚱이가 아니다. 센터 아이들은 고사하고, 내 배로 낳은 내 새끼조차 지겹고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그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스쳤다. 큰 보상보다는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택한 직업이지만, 날이 갈수록 처음의 신념은 사라지고 스트레스만 남는다고 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나는 대한민국 아동복지의 노예인가 보다’라고 혼잣말을 해요. 사회복지사의 사기가 떨어지면 복지 서비스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성 씨는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며 동료 한 명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만삭 때까지 아이들을 돌봤던 그 동료는 출산 도중 과다출혈도 숨졌다. 당시 구로아동센터는 재정에 쪼들려 유족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성 씨는 “우리 일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신념을 지켜 가려 하지만 복지사 개인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지금 상황에서 누가 이 일에 뛰어들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준일·김수연·곽도영 기자 ji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