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기록-증인진술 470건 전산화… 군부가 날조한 서류까지 모두 포함
국가가 지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은폐하려고 해도 결국 진실은 승리한다는 교훈을 남긴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 이 사건을 다룬 비밀 군사파일이 1세기 만에 처음으로 인터넷에 공개됐다.
8일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에 따르면 프랑스 국방역사국(SHD)이 스캔 작업을 거쳐 무료로 인터넷에 공개한 파일에는 당시 사건 조사기록, 증인진술서, 서한, 주요 인물의 보고, 외국 대사관에서 도난당한 서류 등 문서 470건과 서류철 84개가 포함됐다.
프랑스 3공화정에 큰 얼룩을 남긴 이 사건을 둘러싼 군사파일은 드레퓌스의 무죄가 확정된 1906년 기록보관소에 들어갔고, 전체가 한꺼번에 공개된 적은 없었다.
결국 드레퓌스는 반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1895년 2월 비밀리에 남미 기아나의 외딴 섬에 감금됐다.
하지만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흐른 1896년 3월 정보국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확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과 문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과 같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에스테라지를 체포하고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했다. 하지만 군 수뇌부는 체면을 지키고 사건을 조작했던 것을 숨기기 위해 에스테라지를 풀어주고 드레퓌스를 계속 감금했다.
이 문제는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제적 관심사로 비화됐다. 이 와중인 1898년 1월. 훗날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리를 지낸 언론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운영한 일간지 ‘로로르(여명)’ 1면에 대문호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의 글을 실으면서 여론이 반전됐다. 졸라는 이 글에서 “군부가 날조된 증거로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날조 서류 제출자가 자살하고 군부의 거짓이 드러나면서 12년 만인 1906년 드레퓌스의 무죄가 확정됐다. 드레퓌스는 육군에 복직해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두 차례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1935년 7월 11일 사망했다.
파리=이종훈 특파원·백연상 기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