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 하러 온 일본인은 5명이나 더 있었다. 모기와 싸움을 벌여가며 다 함께 고구마를 캤다. 저녁이 되자 할머니 댁에서 소박한 감사 파티가 열렸다. 그때 ‘이로리(위爐裏)’라는 것을 처음 봤다. 안방 바닥을 네모나게 잘라 그 안에 불을 피울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일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런데 파티를 준비하며 적잖게 놀란 점이 있다. 80세 할머니가 계신데도 일본 자원봉사자들의 태도가 영 점잖지 못했다. 다리를 쭉 뻗고 퍼질러 앉거나 심지어 눕기도 했다. 할머니가 열심히 반찬을 나르는 동안 자신들끼리 맥주를 따서 먼저 마셨다.
기자는 그런 일본인의 반응이 오히려 신기했다.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남한테 폐를 끼치지 마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다. 남에 대한 배려심도 많다. 그런데 웃어른을 공경하지 않다니….
그 의문은 최근 책 한 권을 보고 풀렸다. ‘입문 주자학과 양명학.’ 이 책은 한국학을 전공하는 한 일본인 교수의 추천으로 사게 됐다. 그 교수는 “이 책을 보고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책을 읽고서 일본인 교수의 말에 동감했다. 저자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씨는 서문에서 “대부분 일본인들이 주자학과 양명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고 배척해왔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서양중심주의와 근대화 두 개. 근대 이전에는 일본에서도 유교는 매우 중요한 사상이었지만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근대화를 하면서 유교를 ‘쓰러뜨려야 하는 적(敵)’으로 봤다. 그 대신 서양 문물을 철저히 받아들였다.
반면 한국에선 유교, 좀 더 구체적으로 주자학과 양명학이 14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왔다. 지금도 사상적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그랬기에 기자는 80세 할머니 앞에서 행동을 조심했다.
책에는 한국 사례가 무척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양반은 경서를 읽으며 이(理)를 느낀다고 했다. 재미있는 소설책이나 야한 그림이 아닌 경서를 읽고 자신과 이가 합체돼 무한한 쾌락을 얻는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행위나 책에 적힌 문자 등은 기(氣)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이 책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인, 중국인들이 신봉했던 유교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 봐도 재미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매우 비슷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이유를 알 수 있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