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표지에 ‘小說’이라 쓰자 온몸 세포가 다 깨어났다
50여 년 만에 충남 논산에 귀향해 터를 잡은 소설가 박범신이 서재에서 한가로운 모습으로 책장을 넘기며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 20대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문학, 목매 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 소감을 밝혔던 그는 “여전히 소설만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논산=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960년대 초반 고교(전북 익산 남성고)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 사업(포목상)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래도 셋째 매형은 대학에 가야 먹고살 수 있다고 했다. 교육대 등록금이 싸니 도와주겠다는 약속. 전주교대에 입학했다.
꿈이 없는 청년은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떠밀리다시피 해서 교사가 됐다. 1967년 봄 전북 무주의 한 국민학교 교단에 섰다. 홀로 마주친 지독한 외로움. 청년의 젊은 날은 그렇게 허비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뜸해졌다. 청년은 그냥 아무데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음산한 빛의 잔해’란 원고가 만들어졌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가 우연히 그 원고를 봤다. “너, 알고 보니까 소설 쓰는구나.”
그 순간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폭죽이 화려하게 터지는 것 같았다. 며칠 뒤 청년은 왕복 16km를 걸어가 읍내에서 노트 두 권을 샀다. 의기양양하게 노트 표지에 크게 두 글자를 썼다. ‘小說(소설).’ 박범신(67)이 소설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소설가의 꿈 품고 무작정 상경
노트 표지에 ‘소설’이라고 큼지막하게 쓴 그날 밤이 궁금해졌다. 작가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정좌하고 ‘집필’을 시작했는데, 좀처럼 써지질 않아. 온몸의 세포들이 깨어 일어나고,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았어. 하지만 진도가 안 나가더라고. 허허.”
그러나 소설은 이제 그의 목표이자 삶이 돼 버렸다. 포기는 없다. 1969년 봄 무작정 상경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3류 잡지사에 취직했는데, 벌이가 신통찮아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이 했다. 드라마 더빙 원고를 소설로 옮기는 게 그나마 나은 아르바이트였다.
“그때 연속극 중에 ‘FBI’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어. 삼중당에서 그 더빙 원고를 소설로 바꿔달라고 하더군. (원고지) 장당 10원씩 받았는데, 돈버는 재미에 하룻밤에 100장도 썼어. 당시 명동에서 순두부가 50원이었는데 하룻밤이면 1000원이잖아. 배를 많이 곯았을 땐데, ‘순두부 20그릇이다’ 이런 생각하며 밤새 일했어.”
행운의 여신, 미소 짓다
1973년도 신춘문예 마감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아내가 원고 꾸러미를 내놓았다. ‘이 음산한 빛의 잔해.’ 그가 가장 먼저 썼던 글이다. 마뜩지 않았단다. 왜 그랬을까.
“그때 사회참여적인 문학에 관심이 많았어. 난 ‘그 원고는 마스터베이션 같은 원고다. 문학이 아니다’라고 버텼지. 하지만 아내의 부탁에 결국 이틀 밤에 걸쳐 새로 써 ‘여름의 잔해’란 제목으로 보냈어. 근데 그게 덜컥 당선이 된 거야. 거참.”
이 과정에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숨어 있다. 당시 원고는 중앙일보 신춘문예 예심에서 탈락했었다. 문학담당 기자이자 평론가이던 정규웅이 숙직하던 중 탈락된 원고더미에서 우연히 그 원고를 발견한 것. ‘원고가 괜찮은데 이게 왜 떨어졌지?’
정규웅은 그 원고를 본심에 올렸다. 지금 신춘문예는 예심부터 문인들이 담당하지만, 당시만 해도 예심은 기자들의 몫. 우여곡절 끝에 당선된 후 박범신은 “문학, 목매달고 죽어도 좋을 나무”라는 파격적 소감을 밝혀 화제가 됐다.
“그때 소감이 과장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도 그 소감에 공감하고 있어.”
얼마 후 그는 서울 문영여중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날 당시 최고 인기 잡지였던 월간 주부생활에서 청탁이 왔다. 최고 인기 작가였던 최인호나 실리던 잡지. 한 원고가 펑크 나는 바람에 기회가 온 것.
원고지 50장 분량의 단편 하나를 넘겼다. 가짜 여대생과 가난한 세탁소 직원이 각자 크리스마스이브에 신분을 감춘 채 화려한 하루를 보낸다는 얘기였다. 일주일 뒤쯤 주부생활 편집장 백승철로부터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회사로 찾아갔더니 백승철이 덥석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허∼ 한 시대를 풍미할 작가가 몸이 이렇게 말라서 되겠나. 어서 보신탕 한 그릇 먹으러 갑시다.”
백승철은 박범신의 탁월한 감수성을 알아봤다. 보신탕 가게에서 바로 연재를 제의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재. 3개월 만에 여기저기서 청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박이었다. 그의 첫 베스트셀러 ‘죽음보다 깊은 잠’(1979년)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과정이다. 연재를 끝내고 문학예술사에서 펴낸 단행본은 30만 부를 넘기며 그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담배를 달게 피우던 박범신이 뿌옇게 연기를 내뿜었다. “내 작가인생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두 명이야. 신춘문예 당선 때 정규웅 기자하고, 내게 연재를 부탁했던 백승철 편집장이지.” 작가는 재능을 알아본 이들에 의해 명명(命名)된다.
성공과 함께 얻은 상처, 마침내 극복하다
중앙일보에서 ‘풀잎처럼 눕다’, 동아일보에서 ‘불의 나라’ ‘물의 나라’를 연달아 연재하며 그는 1980년대 가장 뜨거운 작가가 됐다. 동시에 ‘대중작가’라는 수식어도 따라다녔다. 엄혹했던 1980년대, 그의 영화(榮華)가 문단 지식인들에게는 불편함이었다. 고통과 번민. 1993년 그는 절필을 선언했다.
추억은 늘 아름다운 게 아닌가 보다. 인터뷰 내내 즐거워하던 작가가 조심스러워졌다. 언어도 묵직해졌다. “제대로 (문단에서) 평가받지 못하는 슬픔을 뒤늦게 알아챘지. 나는 문단하고는 접촉이 없었거든. 순진하게 대중이 많이 읽으면 좋다고 생각했어.”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가장. 소설로 평생 벌어먹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작가. 그랬기에 소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큰 상처를 입었다. 고통스러웠다. 화가 날 여유도 없었다. 자기성찰과 반성에 자학까지…. 자신의 소설이 ‘그 정도’의 대접을 받는다니 차라리 굶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경기 용인 외딴집에서의 은둔 생활 3년. 1996년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면서 절필에서 스스로를 해제했다. ‘촐라체’ ‘외등’ ‘나마스테’ ‘고산자’ ‘은교’ 등을 연달아 발표하며 잃었던 문학적 지분을 다시 쌓았다. 지난해 4월 ‘은교’가 영화화되자 연예인 못지않게 바빠지기도 했다.
“지금도 절필에 후회는 없어. 내 인생에서 매우 좋은 선택이었지. 작가로서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 (절필 전) 그 방식대로 질주했으면 나는 지금 소설을 못 쓰고 있을 것 같아.”
박범신은 2011년 11월 27일 논산에 터를 잡았다. 50여 년 만의 귀향. 당시 작가의 귀향길에 동행했던 기자는 그의 외롭고 처연했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 줄도 쓸 수 없다”며 창작의 고통을 토로했었다. 그가 지금 다 털고 일어났다. 그새 2권의 에세이를 냈고, 4월에는 장편 ‘소금’도 출간한다.
추억여행의 끝자락. 어느새 커피는 싸늘히 식었다. 작가가 툭 한마디 건넸다. “소주 한잔해야지.” 그를 따라 탑정호 옆 술집에 들어가 낙지볶음, 닭발에 소주를 들이켰다. 그의 친구들이 하나둘 모였다. 서울행 차를 놓친 기자는 작가의 방에서 하룻밤을 청했다. 작가는 침대에 눕고, 기자는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작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래 뒤척였다. 기자는 문득 낮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내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일흔에 세상을 뜨셨지. 나야 그보다는 오래 살겠지만 그것을 감안하면 3년 남은 거야. 소설만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그게 내 인생인 것 같아.”
적막한 밤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기자도 쉬 잠들지 못했다.
■ 문학 빼곤 다 버려라 삶이 위태로워질 때 글은 살아날 수 있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까.
공식적으로 등단하는 방법이 가장 대표적이다. 물론 경쟁률이 높다. 매년 신문사들이 주최하는 신춘문예에는 수백 편의 원고가 몰린다. 출판사나 각종 문예지에서 주최하는 신인문학상도 경쟁이 치열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돈을 내면 소설을 출간해주는 출판사도 있다. 출판사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 경우 출간 비용을 모두 본인이 부담한다.
하지만 소설 출간 이전에 글을 쓰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게 작가 박범신의 생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글을 타인이 봐주고 공감해주길 바라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소설을 쓰고, 소설을 업으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박범신에게 소설가 지망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명지대 문예창작과에서 20년간 몸담으며 이기호 백가흠 안보윤 등 50여 명의 소설가를 키워낸 그다. 이른바 문단의 ‘박범신 사단’의 수장이다.
현재 상명대 석좌교수인 그는 지금도 후학에게 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에 절대적인 가치를 둬야 한다”는 게 그가 말하는 창작론의 핵심이었다.
“학생들과 종종 싸웠다. ‘문학에 너의 인생을 헌신해야 한다’고 나는 가르치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 문학은 상대적 개념이다. (세속적으로) 얻는 게 없다면 (문학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되려면 문학에 대한 열망,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문학에 대한 헌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어떤 부문을 축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학에 헌신하면 삶의 다른 부문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렇게 삶이 위태로워질 때 내적 긴장이 일어나고, 결국 작가적 상상력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고향 논산에 내려온 것도 이런 이유라고 했다. 아내가 있는 서울 평창동 집을 떠나 홀로 생활하면서 밥도 잘 못 먹고, 외롭게 생활하며 소설의 생산력을 높였단다. 히말라야 같은 오지를 여러 번 찾은 것도 삶을 위태롭게 만들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했다.
“‘난 작가야’라고 자기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 작가의 삶에 대한 고집도 필요해. (소설이) 1, 2년 사이에 승부가 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출세하는 일도 아니지. 하지만 어떤 고집스러운 갈망 없이 제대로 된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가가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야.”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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