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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우물에서 길어올린 발전소

입력 | 2013-03-12 03:00:00

한국중부발전은 어떻게 인도네시아의 마음을 얻었을까



인도네시아 치레본 화력발전소 건설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한국중부발전의 최병남 현지 운영회사 전 법인장과 박미정 대리, 양영걸 팀장(왼쪽부터)이 2월 2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본사에서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이들은 현지 주민들을 위해 기존 우물(오른쪽 위 사진) 대신 새 우물을 파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12년 7월 발전소(오른쪽 아래 사진)를 완공했다. 한국중부발전 제공


“인도네시아에 새로 짓는 발전소로 부임하셨으면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2007년 11월 최병남 보령화력발전소 본부장은 한국중부발전 본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인도네시아 화력발전소 운영회사의 법인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였다. 정년을 1년가량 앞두고 있던 때였다.

최 전 법인장(63)은 회사의 제안을 반겼다. 40년 가까이 발전소 업무를 하며 쌓은 노하우를 그대로 버리기 아까워서였다.

‘음식도 가리지 않는 편이고, 영어도 할 줄 아는데 뭐가 문제겠어. 한번 부딪쳐 보자.’ 최 전 법인장은 흔쾌히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인도네시아 치레본 화력발전소 건설사업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뒤 외국 회사들을 대상으로 발주한 최초의 대규모 민자(民資) 발전소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중부발전에 각별했다. 총사업비만 8억5000만 달러(약 9265억 원) 규모인 데다 입찰에 성공해 발전소 운영권을 얻으면 인도네시아 전력청에 30년간 전기를 팔아 1조 원 이상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중부발전은 일본 종합상사인 마루베니, 국내 석탄 채굴업체 삼탄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2006년 5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더 큰 어려움은 그때부터 생겼다. 한국의 평화로운 어촌 정도라고 봤던 발전소 터 주변 마을의 여건은 생각보다 나빴다. 가축 분뇨 때문에 곳곳에 악취가 가득했다. 주민들은 상수도 시설 없이 우물 하나로 식수와 세탁을 동시에 해결했다.

‘이렇게 여건이 안 좋은데 과연 직원들이 오려고 할까?’ 최 전 법인장의 고민이 깊어졌다.

얼마 전 정식 직원이 된 박미정 대리(32)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외국어대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전공하고 현지 어학연수를 했던 그는 회사가 인도네시아 진출을 준비할 때부터 인턴으로 일했다. 인도네시아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때부터 인도네시아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현지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책이나 인터넷에서 얻을 수 없는 집값, 상권, 교육, 문화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 3개월이 지나자 A4 용지 300쪽 분량이 모였다. 직원과 가족들의 현지 정착을 위한 훌륭한 가이드북을 만든 것이다.

그 무렵 현지에 먼저 나간 양영걸 팀장(41)을 비롯한 중부발전 직원들은 발전소 터가 아니라 새 우물을 팠다. 오염된 지하수 대신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는 심정(深井)이었다. 생활의 터전을 잃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거부감을 가졌던 현지 주민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2009년경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자 현지인 직원들이 발목을 잡았다. 서로 반목하고 경계하는 데 익숙한 수십 개 부족 출신의 직원들은 한쪽에 잘 대해 준다고 서로 불만을 제기했다. 최 전 법인장은 TV를 보던 직원들의 모습에서 해결 방안을 찾았다. 배드민턴 경기를 볼 때만큼은 언제 다퉜느냐 싶을 정도로 너 나 할 것 없이 즐기는 데서 착안했다. 최 전 법인장은 곧바로 일주일에 한두 차례, 일과가 끝난 뒤 배드민턴 경기를 열었다. 부족들을 섞어 팀을 만들고, 우승팀에 줄 상품도 내걸었다.

“그때부터 직원들의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서로를 의심하던 이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동료애도 생겨나기 시작했지요.”(최 전 법인장)

현지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도 점차 개선해 나갔다. 인도네시아 기술자들은 계약 서류에 적힌 업무 범위에서 벗어난 일은 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정해진 기간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없었다. 난감해하던 양 팀장이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평소 한국의 발전을 부러워하던 직원들의 모습에 착안해 “한국이 빠르게 성장한 이유는 협력”이라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직원들에게는 확실한 보상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직원들은 양 팀장의 지시를 잘 따랐고, 부진했던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이들이 노력한 끝에 발전소는 지난해 7월 공식 운전에 들어갔다. 최 전 법인장도 지난해 말로 임기를 마쳤다. 인도네시아 화력발전소 현장에서 퇴임식을 하던 날 현지 직원들은 “사진 한 장 남기고 싶다”며 카메라 앞에서 그의 팔짱을 끼었다. 허허벌판 염전이던 시골 마을을 잘살 수 있게 변화시킨 데 대한 감사의 의미였다.

이제는 은퇴한 최 전 법인장은 “우리 방식만 고집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면서 서서히 우리의 생각을 녹여낸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본다”며 치열했던 직장생활의 끝 무렵을 회고했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