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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교실 이데아

입력 | 2013-03-12 03:00:00

번역극 ‘히스토리 보이즈’ ★★★★




영국 최고 엘리트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조적 인문학 수업을 통해 ‘지의 향연’을 펼쳐내는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직역하면 ‘자유로운 시민을 위한 고전교육(liberal arts)’에 해당하는 일반교양을 가르치는 노교사 헥터(최용민·가운데)는 교실 문을 잠근 채 펼치는 자유분방한 토론과 상황극으로 영혼의 자유와 충만을 일깨운다. 노네임씨어터컴퍼니 제공

이 연극을 보며 많은 사람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90년)를 떠올릴 것이다. 엘리트 남자 고교생을 상대로 시험의 노예가 되지 않고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도록 이끄는 교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의 수업이 ‘죽은 사람이 남긴 빵을 함께 나눠 먹는 동맹의식’을 닮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학생들이 “캡틴, 오 마이 캡틴”이라고 우러르는 키팅 선생 같은 멋진 교사는 기대하진 마라. 그 비슷한 교사가 등장하긴 한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한껏 고양시키는 늙은 문학교사 헥터(최용민)와 통념의 역사에 맞서 독창적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도록 유도하는 젊은 역사교사 어윈(이명행)이다. 헥터와 어윈의 조합은 얼핏 문학교사였던 키팅의 인문학적 확대로도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교사로서 치명적 결격사유가 있다. 둘 다 동성애 성향을 지녔다. 헥터는 방과 후 남학생 중 한 명을 돌아가며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가다 위태위태한 성희롱을 즐긴다. 어윈은 매력적인 남자 제자를 마음에 두고 끙끙거린다.

게다가 두 사람의 교육관은 상충한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진학을 꿈꾸는 ‘옥스브리지 반’의 엘리트 학생들에게 시험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일반교양을 가르치는 헥터는 구제불능의 로맨티시스트다. 그는 인문학이 아무 쓸모가 없기에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을 굳게 믿는 보편주의자다. 그래서 자신의 수업이 시험이나 출세 같은 세속적 목표로부터 순수한 성역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반면 옥스브리지 반 학생들에게 역사 논술 및 면접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특별 채용된 어윈은 영악한 리얼리스트다. 천편일률적인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답안지보다 기상천외한 논지로 전개되는 답안지가 옥스브리지 시험관들에게 얼마나 신선하게 다가서는지를 꿰뚫는 실용주의자다. 그래서 제자들이 헥터의 수업시간에 배운 박학다식한 인문학적 지식을 마음의 양식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로부터 수업을 받는 7명의 엘리트 학생은 갈등한다. 그것은 문학과 역사, 감성과 이성, 환상과 사실, 본질과 실용, 보편과 상대의 충돌이다. 결코 고교생만의 고민거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민거리란 소리다.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이 2003년에 발표한 이 작품 속 수업시간에 등장하는 인문학적 지식을 이해할 한국의 고교생이 얼마나 될까.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영국의 TV 코미디 ‘캐리온’ 시리즈까지, 필립 라킨과 위스턴 휴 오든의 시부터 펫숍보이스의 팝송 ‘이츠 어 신’까지, 보어전쟁에서 홀로코스트까지를 넘나드는 ‘지의 향연’은 대학을 졸업한 일반 성인들에게조차 버겁다. 사실 동성애 코드가 강하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죽은 시인의 사회’보다는 플라톤의 ‘향연’에 더 가깝다. 이를 대사와 연기로 풀어내야 하는 배우 중 상당수는 그저 아는 척하기에 급급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고교생은 꿈도 못 꿀 인문학적 세례를 받은 ‘밥맛’들이 끝없이 잘난 척하는 이 연극은 2004년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상의 연출상 등 3개, 2006년 미국 토니상의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한국교육의 문제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의 심각성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꼭 이 작품에 도전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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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3만∼5만 원. 02-744-433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