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영국의 넬슨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조선의 이순신에 견주지는 말아 달라. 난 그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간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을 맡아 1905년 러시아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한 말이다. 주변에서 자신을 이순신과 같은 급으로 칭송했을 때 도고 제독은 고개를 내저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에 참담한 패배를 안겨준 적장에게 그가 무한한 존경심을 표한 이유는 명쾌했다. 넬슨 제독은 유(有)에서 유(有)를 창조한 데 비해 이순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인물이란 것이 그의 답이었다.
▷1592년 충무공이 거북선을 이끌고 일본 수군을 무찔렀던 한산대첩과 1805년 넬슨 제독이 프랑스와 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한 트라팔가르해전은 세계해전사에서 불후의 전설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은 동서양을 대표하는 해군 명장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걸어온 길은 딴판이다. 넬슨이 강력한 국가의 지원 속에 승리를 거둬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면 충무공은 모함과 당쟁에 휘말려 옥고까지 치르면서도 불멸의 신화를 남겼다. 유부녀였던 에마 해밀턴과 열정적 로맨스에 빠졌던 넬슨과 달리 충무공은 인간적 면모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최근 이순신을 제목에 사용한 KBS의 주말드라마가 논란을 낳고 있다. 인기가수 아이유가 주연을 맡은 ‘최고다 이순신’은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여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박스타가 되는 성공담을 담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인터넷에서 이순신을 검색하면 ‘아이유’부터 나오는 등 엉뚱한 상황이 빚어지면서 해외 유학생들로 구성된 한 시민단체가 그제 법원에 이순신 이름 사용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제목도 문제지만 “우리 회사 말고 독도나 지켜라” “이 100원짜리야” 같은 대사도 논란거리다.
▷방송사 측은 내심 논란을 즐기는 듯 요지부동이다. 제작진은 “아이유의 극중 이름 이순신(李純信)은 장군 이순신(李舜臣)과 한자가 다르다. 장군처럼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견뎌낸 것을 보여드리려는 순수한 의도로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처투성이 우리 사회에 따스한 위로를 선사한다’는 게 기획 의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 게시판에는 방송사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며 “일본은 전쟁 범죄자를 영웅으로 만드는데 어떻게 한국은 자국 위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나” “공영방송이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을 상업화시켰다”라는 등 성토의견이 많이 올라 있다. KBS는 2004년에도 ‘불멸의 이순신’으로 상처투성이인 우리 사회에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위로를 선사했는데, 그때의 ‘이순신’을 아직도 못 잊고 있나 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