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논설주간
필자의 학창시절에는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죽은 초대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실제로 그는 과오가 많은 대통령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서울을 사수한다”고 국민을 속이고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갔다. 말기에는 헌법을 멋대로 고쳐 장기집권을 했고, 종국에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 수백 명이 경찰 발포로 죽었다.
하지만 근년에 이르러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공산권이 무너지고 북한이 불량 국가로 전락함에 따라 이승만이 향도한 자유민주주의와 반공(反共) 노선이 옳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이승만에게 남북분단의 고착과 전쟁발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라도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김일성과 박헌영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에서 이 나라를 구해내는 데 그가 큰 공을 세웠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를 다큐멘터리 첫머리에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인용한다. 무릇 어느 나라나 개인에 관한 정보기관 보고서란 정보요원(IO)들의 주관이나 편견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권력의지를 나쁘게 볼 것만도 아니다. 권력의지가 없는 사람이 상하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의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동시에 미국 하버드대의 석사학위를 딴 것과 관련해 백년전쟁은 거래와 특혜를 통해 받은 학위라고 몰아붙인다. 잘못 짚은 비난이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석사학위 없이 박사학위 과정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 친일 발언을 거듭했고 폭력단을 이끌고 교민사회를 장악하고 학교 기숙사비를 횡령한 ‘하와이언 갱스터’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당시 하와이 교민사회는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분열돼 대립이 심했다. 한쪽 자료만 인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은 초지일관 항일 정신을 유지했고 치부를 하지 않았으며 여성관계에서도 흠이 없었다”며 “과단성 있고 유능하며 도덕적으로도 안창호에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노디 김이라는 26세 여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미국 당국에 의해 수사를 받았다는 근거로 백년전쟁이 내놓은 사진은 조작된 것이다. 노디 김과 이승만이 10년 간격을 두고 따로 따로 찍은 사진을 따붙이기 해 같은 날 경찰서에서 조사받은 것처럼 조작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을 친일파 갱스터에 바람둥이 협잡꾼으로 매도하고, 건국세력에 친일 컬래버레이터(협력자)라는 딱지를 붙여서 결국 무엇을 얻자는 것인가. 좌파세력인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한 것을 보더라도 이승만은 해방 공간에서 조선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백년전쟁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관(史觀)에 입각해 현란한 미디어 조작기술을 과시한다. 미래세대에게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한 균형 잡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