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 인천가톨릭대 교수
그는 이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어 맨손으로 흙과 돌을 들어 나르며 성당을 보수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몰락 위기에 처한 중세 교회를 위한 ‘세기적’ 명령이었다. 이를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탁발 수도회를 창설하여 위대한 개혁의 첫걸음을 내디딘다. 그가 표방한 것은 복음으로 돌아가 청빈, 겸손, 소박의 삶을 몸소 사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심각하게 앓고 있던 세 가지 병폐인 부, 권력, 사치에 대한 명처방이었다. 그 파급력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힘으로 밀어붙인 무력 혁명도 아니요, 센세이셔널한 사상으로 새 시대를 연 이데올로기 혁명도 아닌, 그저 소박한 실천운동이었지만 세기를 거듭할수록 파장은 기하급수적으로 거세어져 갔다.
호르헤 베르고글리오 신임 교황이 자신의 공식 명칭을 프란치스코라고 정한 것은 13세기의 저 기념비적 사건을 연상시킨다. 예수회 출신인 그가 굳이 프란치스코를 즉위명으로 택한 것은 바티칸 전문가 존 앨런이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놀라운 결정”임에 틀림없다. 만일 그가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에 내장된 그 가공할 함량을 직관하고서 이 이름을 빌렸다면, 그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를 향후 교황직 수행의 지평으로 삼지 않았을까 기대된다.
둘째는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서 생태학적 접근법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사명이 유장했음에 비해, 그의 접근법은 의외로 단순 소박했다. 그는 단지 예수의 복음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다. 보잘것없는 이들을 돌보고, 원수를 사랑하고,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보듬어 주고…. 요즘 사회운동가들이 볼 때, ‘이래 가지고 무엇을 이루겠나’ 싶을 만큼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은 모든 것에 침투해 소리 없이 변화의 싹을 틔웠다. 신임 교황의 프로필을 일별해 보면, 그 역시 타고난 생태학적 영성가임을 금세 알아채게 된다. 직접 요리를 즐기고, 외출할 때도 자동차를 몰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시간 나는 대로 빈민가를 방문하고 사회에서 지탄받는 이들을 위한 사회적 봉사를 즐겨 했다고 하니 말이다.
800년 전에 비할 때 오늘의 시대상황은 천지개벽하듯 바뀌었지만, 개혁 요청의 수위는 거의 동급이다. 교회 안팎에서 밀려오는 변화의 탄원은 이제 한계선에 가까워지고 있다. 주교의 민주적 선출과 주교 임기제, 사제 독신제 폐지, 이혼 후 재혼한 사람들의 성사 허용, 여성사제 서품 허용, 인공피임 재고 등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아직 누구도 언급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안들이 구미 교회에서는 연일 공론화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전 세계 인권과 평화의 최후 보루로서 바티칸의 역할 또한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명령 앞에 신임 교황 프란치스코의 향후 영적 정치적 행보에 흥분과 기대가 쏠린다. 40대를 넘기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거니와, 언론에 뜬 첫 사진을 보는 순간 ‘이 분, 일 한번 크게 내시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그 기대가 괜한 바람은 아닐 듯하다.
차동엽 인천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