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브레인 산실 KDI 인맥
1972년 7월 4일 서울 동대문구 홍릉의 한국개발연구원(KDI) 본관 개관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직접 테이프를 잘랐다. KDI는 1971년에 설립됐지만 첫 1년여 동안 서울 서소문 지역의 한 건물을 임시로 사용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만제 초대 원장,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박 전 대통령, 태완선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KDI 제공
한국개발연구원(KDI) 42년 역사의 첫 페이지에는 스스로를 ‘예수의 12제자’라 불렀던 이 학자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가 매우 귀했던 시절, KDI는 설립과 함께 ‘잘나가는’ 한국인 경제학자를 싹쓸이했던 것이다.
KDI를 향한 박 전 대통령의 애정은 각별했다. ‘12제자’들은 KDI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당시 대학교수의 3배가 넘는 연봉, 아파트 전세금, 기사 딸린 자동차를 받았다. 12인의 창립멤버 중 한 명이었던 김영봉 세종대 석좌교수는 “박 전 대통령은 사옥 공사현장을 여러 번 시찰했고 청와대 조경담당 비서관을 보내 설계를 도우라고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서울 동대문구 홍릉 본관이 완성된 다음에는 초대 김만제 원장과 연구원들을 초대해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화려한 파티까지 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설립 기금으로 사재 100만 원을 보탰다는 후문도 있다.
서울 동대문구 홍릉에 있는 KDI 본관.
지난 40여 년간 수많은 고급 인재를 배출한 KDI의 ‘맨 파워’는 양질의 인재에 대한 독점적 지위와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을 키우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서 비롯됐다. 설립 초기였던 1970년대에 KDI는 정부 경제 정책과 경제 분석에 관한 연구를 사실상 독차지했다. 다른 국책기관은 1976년 설립된 중동문제연구소(현 산업연구원) 정도. 지금 막강한 ‘인재풀’을 자랑하는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1980년대 중반에야 문을 열었다. 초기 KDI의 보고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정부 정책에도 비중 있게 반영된 것은 이처럼 대한민국의 ‘경제 브레인’으로서 희소가치가 높게 평가된 결과다.
하지만 초기 KDI 연구원들의 정관계 진출은 활발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이 KDI를 아낀 만큼 이들을 연구원에 붙잡아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만제 원장도 경제부총리 등의 후보로 여러 차례 올랐지만 박 전 대통령이 “KDI는 경제기획원 못지않게 중요한 기관이고, 김 원장이 잘하고 있으니 추천 대상에서 빼라”고 직접 지시하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었다.
김 원장은 박 전 대통령의 서거 때까지 KDI를 지켰고, 전두환 정권 때인 1983년에야 재무부 장관이 됐다. 12인의 창립 멤버 중에서는 김대영 연구원이 훗날 건설부 차관이 됐을 뿐 나머지는 대학이나 다른 국책연구원으로 흩어졌다.
설립 때부터 경제 분야 ‘인재은행’ 역할 부여
1992년 KDI 원장을 지낸 송희연 아시아개발연구원 이사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KDI를 만든 목적은 정부 경제 정책을 설계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인재들을 한국 사회의 필요한 곳에 공급하기 위한 징검다리 또는 인재풀 역할을 기대한 측면도 크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의 뜻대로 KDI는 ‘인재은행’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지금까지 KDI를 거친 석·박사급 인재는 약 850명으로 대부분이 박사급이다. KDI가 지금까지 배출한 전현직 국회의원은 13명, 현재 연락처가 파악된 대학교수만 184명이다. 강승룡 KDI 홍보팀장은 “다른 연구기관으로 옮겼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까지 합치면 KDI가 배출한 인재의 규모는 더 클 것”이라고 했다.
현직 의원으로는 새누리당의 유승민 유일호 이종훈 김현숙 의원이 있다. 한국조세연구원장 출신인 유일호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일 때 비서실장을 맡았다. 이종훈 의원은 명지대 교수를 거쳐 지난해 정치권에 입문한 노동경제학자다. 모두 여권에서 경제 정책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상당수는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를 거쳤다가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하는 코스를 밟아왔다. 유승민 의원이 대표적인 사례. 그는 이회창 전 총재에게 발탁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거친 뒤 2004년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했다.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가 다소 멀어졌지만 친박(親朴)의 원조 격이다. 친이(親李)계인 진수희 전 의원도 여의도연구소장 등을 거친 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의 김광두 원장도 한때 초청연구원 신분으로 KDI에 몸담은 적이 있다.
장차관급 고위 관료 중에는 김만제 부총리와 사공일 재무부 장관,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 서상목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구본영 과학기술처 장관, 최광 보건복지부 장관, 김기환 상공부 차관, 박영철 대통령경제수석, 정진승 환경부 차관,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상 전직) 등이 있다. 차관급인 금융통화위원에도 KDI 출신이 다수.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대통령경제수석,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 등의 경력을 쌓았다. 2004년 금통위원이 된 이덕훈 키스톤사모펀드 대표(전 우리은행장)와 강문수 KDI 명예연구위원도 모두 1980년대부터 장기 근속한 정통 ‘KDI맨’이다. 새 정부의 첫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된 현오석 후보자는 2009년부터 KDI원장을 지냈다.
KDI 홍릉 본관 1층 로비에 걸려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번영을 향한 경제설계-한국개발연구원 개관에 즈음하여’라고 적혀 있다. KDI 제공
KDI 출신에 대한 외부의 선호도가 높다 보니 KDI 42년 역사에 연구원으로 정년을 마치는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2004년 KDI의 ‘1호 정년퇴직자’가 된 유정호 명예연구위원은 “워낙 능력 있는 사람이 몰려있는 집단이라 인재를 많이 배출한 것일 뿐 KDI 출신들 사이에 선후배들을 특별히 챙기는 성향은 없다”고 말했다. KDI에는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연우회’라는 ‘올드보이(OB) 모임’이 있다. 역대 회장단과 전직 관료, 국회의원들이 자주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앞으로 KDI가 이전만큼 독점적 ‘인재은행’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과거 고도성장기에 비해 지금은 국내외 명문대 출신 경제학 박사의 공급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당장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안에도 박사학위 소지자가 수십 명에 이른다. 연봉, 연금 등 처우도 대학이나 민간 연구소보다 좋지 않고 올해 말 세종시 이전이 예정돼 직장으로서의 매력은 크게 떨어졌다. KDI에서는 최근 3년 동안 10여 명이 사직서를 냈다. 1980년대 KDI에서 일한 한 연구원은 “예전에는 ‘우리가 국가경제에 선도적으로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요새는 연구원들의 목적의식이나 자부심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KDI 출신들이 새 정부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막상 박근혜 대통령은 KDI와 별다른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창기 연구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주 KDI를 찾았지만 딸의 모습은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송희연 이사장은 “당시 KDI 연구원들이 자주 청와대를 찾아 현안보고를 했고, 박 전 대통령이 경제기획원과 KDI를 통해 경제 정책을 짰던 것을 박 대통령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라며 “그런 기억이 지금까지도 KDI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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