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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의 그때 그곳] 한용운의 첫 집이자 마지막 집, 서울 성북동 심우장

입력 | 2013-03-18 03:00:00

말년에 정착한 만해, 중생의 언어로 독립투쟁




서울 성북동 222-1에 있는 심우장은 작은 암자처럼 고즈넉하다. 한용운은 이 집에서 1933년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11년간 작품 활동을 했다. 권영민 교수가 먼 곳을 응시하며 앉아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사진)이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은 작은 암자처럼 고즈넉하다. 심우장에 오르는 좁은 비탈길은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 어지럽고 지저분하다. 성북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이 언덕배기 동네는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주민들의 심경도 복잡한 듯하다. 담벼락에 온갖 욕설까지 섞인 구호가 덕지덕지 붙었다. 한용운이 살아서 이런 정경을 본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한용운은 충남 홍성의 외진 촌락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던 그는 동학에 가담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가난한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큰 뜻을 세웠다. 그러나 동학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설악산 오세암에 숨어든 것은 나이 스물이 훨씬 넘어서의 일이었으며 이때부터 불가에 입문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직전 그는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문물을 두루 살피고 돌아왔다. 경술년(1910년) 국치를 당하자 그는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떠돌다가 마음을 다잡고 돌아와 침체한 불교의 혁신운동을 내세워 유명한 ‘불교 유신론(維新論)’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불교운동은 종교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불교계를 대표하여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한 한용운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 가까이 투옥됐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書)’를 기초하였다.

심우장 안에는 만해의 초상화와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 복제품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 백담사로 다시 들어가 거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년)을 내놓았다. 이후 많은 한시(漢詩)와 시조를 발표하면서 불교 개혁의 구상을 실천해 나아갔다. 그는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던 승려였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던 저항적인 지식인이었다.

심우장은 한용운이 평생에 가져본 유일한 집이었다. 서울에서 지낸 말년의 삶이 그대로 이 집에 담겨 있다. 백담사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이곳저곳 절간을 떠돌며 지내고 있던 그가 1933년 유숙원(兪淑元·1898∼1965) 여사와 혼인하자 지인들이 뜻을 모아 이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승려의 결혼을 지지했다.

한용운은 집이 생기자 심우장이라는 택호를 붙였다. 불도(佛徒)의 한 사람으로 초심(初心), 구도(求道)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이 이름을 붙인다는 설명도 하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십우송(十牛頌)’을 쓰기도 하였다. ‘십우송’ 10편의 시 가운데 첫 수인 ‘심우(尋牛)’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래 못 찾을 리 없긴 없어도/산속에 흰 구름이 이리 낄 줄이야!/다가서는 벼랑이라 발 못 붙인 채/호랑이 용 울음에 몸을 떠느니’

한용운은 심우장에 기거하는 동안 부처의 말씀이 아니라 중생의 언어와 씨름했다. 그는 ‘심우장 산시(散詩)’를 썼고, 장편소설 ‘흑풍’ ‘박명’ ‘후회’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잡지 ‘불교’를 속간해 ‘신불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면서 많은 불교 관련 논설을 직접 썼다. 그는 일제가 강요했던 창씨개명운동을 거부하였고, 이광수 등이 조선인 학병 출정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고 다닐 때 그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우장은 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44년 그는 한평생을 바쳐 투쟁하며 열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의 위대함은 그의 투철한 삶과 의지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지만 특히 그의 글쓰기가 이를 입증한다. 투철한 역사의식도 글쓰기를 통해 구현되었고 깊은 정서도, 높은 이상도 글을 통해 구체화하였다. 특히 오랫동안 한학 수업을 받았을 뿐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한 신학문 접근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시집 ‘님의 침묵’에 수록된 한용운의 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13일 찾은 심우장은 찾는 이 없이 고즈넉했다. 마당 앞에 수령 90년이 넘은 커다란 소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심우장 본채는 작은 기와집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이 일대가 재개발되어 성북동 언덕보다 더 높은 아파트로 둘러싸이면 어쩌나 걱정이다. 저 큰 소나무와 어울리는 ‘만해공원’이라도 들어선다면 어떨까. 돌아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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