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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시인의 홋카이도.문.답]아사히야마 동물원에서 펭귄과 함께 산보를

입력 | 2013-03-18 13:50:28


홋카이도의 두 번째 도시인 아사히가와에 대한 기억은 그저 조용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역에서 내려 정면으로 훤히 나 있는 번화가를 따라 걷다가 갑자기 활기가 끝나는 길목 끝 지점에 서서 약간 당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길목 한켠에 있는 그릇 가게를 만났더랬다.

낡은 나무 창문 틈으로 소박한 일본 전통 그릇들이 수북하게 쌓인 것을 보았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 안쪽에서 작은 방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구부정한 몸의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눈으로 인사를 나눈 뒤, 그릇들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공손히 선 채로 나와 거리를 두고 서 계셨다.

먼지 쌓인 그릇들이 올려진 선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접시 두 장을 사기로 했다. 나의 일본어가 서툰 걸 알고는 할머니가 한국에서 왔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자, 나무젓가락 하나를 같이 포장해서 건넸다. 작은 선물이라고 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할머니는 화병에 꽂힌 빛바랜 꽃처럼 서서, 그러면서도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배웅했다. 그 여린 기억이, 내가 가진 아사히가와의 기억의 전부지만 나는 가끔 그 은은한 기억에다 손을 뻗곤 한다.       

아사히야마 동물원은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홋카이도를 여행한 친구로부터 언제 기회가 있으면 꼭 가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곳을 찾아가는 기분은 꼭 소풍날의 그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기분으로 스낵 한 봉지도 배낭에 챙겨 넣고 말이다. 
  

동물원에 들어가자마자 축제의 행렬처럼 느껴지는 인파 틈을 비집고 서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안쪽을 슬쩍 엿보았다. 세상에나. 청명한 하늘을 이고 펭귄들이 아장아장 산보를 나와 걷고 있었다.  

목에다 레몬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듯한 황제펭귄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귀족적이었다. 특이한 습성을 가진 무리로 잘 알려진 황제펭귄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기로 유명한데 그것은 인간의 자식 사랑이 평민의 수준이라면 그들은 이름에 걸맞는 ‘황제애’로 키운다.

펭귄들의 행진을 보느라 자세를 낮추고 있자니 마음의 키가 낮아지면서 순해진다. 펭귄들은 단순히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매와 얼굴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걸었다.

원래는 펭귄들을 운동시키기 위해 산책하는 시간을 정해 놓은 것이지만 어느덧 이곳 동물원의 하이라이트로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펭귄 퍼레이드 앞에서 참을 수 없는 함박웃음을 웃고 그 흥분으로 가장 많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 같았다.

북극곰과 호랑이, 바다표범과 늑대들의 야성어린 눈빛들과 마주치자 내 마음도 번쩍했다. 이 동물원은 동물들에게 먹이는 주는 방식이 특별하다. <모그모그타임>이라고 하는 먹이는 주는 시간에 사육사는 단순히 먹이를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동물 스스로 먹이를 구해 먹게끔 장치를 마련해 둔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야생의 습성을 존중함으로써 그들을 제대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동물원에서 나와 늦은 점심으로 ‘스프카레’를 시켰다. 닭고기 카레인데 국물이 자작한 정도의 훌륭한 요리였다. 동물원과 카레라니. 스프카레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유년시절에 처음 먹어봤던 카레맛과 처음 가봤던 동물원의 나른한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뭐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여행을 잘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던 나는, 이런 식으로 우연히 닥치는 인연들 앞에서 갑자기 부자가 되고 만다. 그 인연은 사람이기도 하며, 이런 날의 동물이기도 하며, 또 두고두고 생각나는 음식이기도 한 것이다.  

뭐든 기대하지 않는 것, 그러다 우연히 날것의 느낌들을 만나 껴안는 것, 나에겐 그것이 여행이다.

시인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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