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날 무시” 목졸라… 범행후 유서쓰고 자살 시도
“할머니가 엄마 위에 올라타서 막 때렸어. 엄마가 일어나질 않아.”
18일 오후 9시경 대구의 한 빌라 거실. 다섯 살난 ○○이는 휴대전화로 아빠 A 씨(36)에게 이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불길한 예감이 든 A 씨는 엄마를 바꿔 달라고 했지만 아들은 “아빠, 아빠…”를 반복하며 흐느끼기만 했다.
아들을 돌봐 주고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급히 달려온 A 씨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망연자실했다. 어머니 B 씨(57)는 안방에, 아내(34)는 거실에 각각 쓰러져 있었다.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만삭의 아내는 창백한 얼굴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이는 충격에 빠진 듯 마루 구석에서 눈만 껌뻑거렸다.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수면제 약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빈 소주병 2개가 뒹굴고 있었다. 도화지에 큰 글씨로 쓴 유서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유서에서 “나 혼자 죽으려고 했는데 너(며느리)를 죽이고 죽겠다”고 적었다. “내가 깨끗이 빨아 입힌 손자 옷을 며느리가 다시 세탁기에 넣었다. 열심히 청소를 했는데 며느리가 잔소리를 하며 다시 청소를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일 대구 성서경찰서에 따르면 B 씨는 20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최근에는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 죽고 싶다. (며느리에게) 무시당해 자살하겠다’라는 말을 자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울증에 고부 갈등까지 깊어지면서 극단적인 일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 당일 회사를 마친 며느리가 아들을 돌봐 주는 시댁에 들렀을 때 B 씨는 술에 취해 있었다. 며느리는 손자 앞에서 술을 마신 시어머니를 타박했고 몸싸움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B 씨는 수건으로 며느리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뒤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B 씨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다.
우울증 환자는 해마다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이 심해지면 현실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정신분열 현상이 동반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환청, 환각 증세와 함께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까지 생겨 살인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희철 계명대 동산의료원 교수(정신건강의학)는 “심한 우울증은 가족의 관심만으로는 치유하기 힘들다. 병원에서 지속적인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구=장영훈 기자 j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