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허영의 시장’(1848년 출간)이라는 제목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1678년 출간)에서 따왔다. 책 속 순례자가 지나가는 ‘허영’이라는 도시의 저잣거리를 19세기 영국에 빗댄 것이다. 모든 것이 겉만 번지르르할 뿐 탐욕과 허영이 난무하는 공허하고 썩은 세상을 은유한다.
이 소설의 부제는 ‘a novel without a hero’다. 영어에서 문학작품의 주인공을 의미하는 ‘hero’는 원래 과거 서사시나 비극 같은 고전문학의 주인공이 국가나 민족의 영웅이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이 말은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영웅적인 훌륭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소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19세기 영국은 영웅적인 인물을 배출하지 않는 사회임을 시사한다.
이 소설에서 중심인물은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두 여주인공(어밀리어, 베키)이다.
어밀리어는 매우 착하고 순수해서 도빈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받지만 생의 역경을 통해 원숙해지거나 공감력이 확대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아들 외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둔감하고 미련한 여인이 된다.
이 소설에서 흥미의 중심이자 비평적 논란의 핵은 악녀 베키 샤프다. 베키 샤프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허용되는 오늘날에는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CEO)가 되거나 매우 유능한 정치가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가난한 여자가 출세와 부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미모와 지능을 정당하지 못하게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소설에서 드러나는 베키의 술수와 도덕 불감증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 때문에 발현되었다고만 보기엔 도를 넘는 수준으로, 병리적 요소가 있어 보인다. 베키의 지칠 줄 모르는 투지와 지략은 많은 독자를 매료하고 대리적인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는 사회악이었고 자신이 본 피해보다 주변에 끼친 피해가 훨씬 컸다.
이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모두 아무런 이상이나 목표 없이 그날그날의 쾌락을 위해 살아간다. 이들은 자신들처럼 무가치한, 속악한 인물의 집단인 사교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파렴치하고 범죄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상스럽고 야비한 준남작 크롤리 경을 비롯해 베키를 몰아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준남작의 큰 며느리, 유부녀인 베키 주위에 하루살이처럼 모여드는 귀족, 부자들은 모두 천박함 경연대회에 출전한 것 같다.
베키의 남편 로던은 악의는 없지만 남의 돈으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다. 아내 베키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아내를 떠나지만 그것이 가치관의 반성이나 새로운 삶의 계기가 되지 못한다. 또 어밀리어의 시아버지이자 조지의 아버지인 오스본은 친구(어밀리어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사업을 일으켜 큰 재산을 이룩했음에도 친구의 사업이 기울자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는커녕 아들과 어밀리어의 결혼을 금지한다.
이렇게 이 소설에는 우러러볼 만한 인물, 사표를 삼을 만한 인물이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작가 새커리가 자기 시대에 대해 내린 진단이기도 하다.
새커리는 이 소설의 배경으로 섭정시대(정신병이 발작한 조지 3세를 대신해서 후에 조지 4세가 된 그의 아들이 섭정을 하던 1811∼1820년)를 택했다. 이 시기 영국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한데도 지도층은 갈피를 못 잡고 쾌락에 몰두했으며 빈부격차는 너무도 심했다. 조지 4세의 요란스러운 예술 애호 성향이 당시 시대정신의 지표라 할 만하다.
이 소설의 제목은 버니언의 소설에서 따왔지만 “우리 중에 욕망을 성취한 사람이 있는가? 또는 욕망을 성취하고 만족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저자가 탄식하는 결론 부분을 비롯해 작품 전 편이 구약성서 중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 허영의 시장 줄거리는
베키를 불쌍히 여긴 어밀리어는 그녀가 가정교사로 떠나기 전 잠시라도 편히 지내면서 사교 생활도 맛보라며 집으로 초대한다. 어밀리어의 집에 머무르게 된 베키는 매력은 없지만 돈은 많은 어밀리어의 오빠 조지프를 유혹하지만 결혼에 이르진 못한다.
결국 크롤리 준남작(남작과 기사의 중간 정도 작위)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된 베키는 거기에서 크롤리와 그의 부유한 누나의 신망을 얻는다. 크롤리는 아내가 병으로 죽자 베키에게 구혼하지만 그가 이미 자신의 둘째 아들인 로던과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베키는 간절히 준남작 부인이 되고 싶었지만 부인의 병세가 불확실해서 돈 많은 고모의 총애를 받는 로던과 결혼한 것인데, 고모는 두 사람의 비밀결혼에 대로해서 조카와 절연한다.
한편 어밀리어는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면서 조지와의 결혼도 취소될 위기에 처하지만, 조지의 친구 도빈이 조지를 설득해서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조지는 금세 어밀리어에게 싫증을 내고 워털루 전투에 참가해 전사한다. 어밀리어는 유복자를 낳아 온 정성을 다해 기르지만 친할아버지가 친권을 요구하자 아들의 장래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보낸다.
무일푼으로 결혼한 로던과 베키는 화려하게 사교계에 진출한다. 로던이 노름에서 따는 돈과 베키가 상류층 남성들에게서 받은 비싼 선물을 처분한 돈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지자 빚과 외상으로 꾸려 간다. 그러던 중 로던은 사기도박으로 구속되고, 얼마 되지 않아 출소해서 돌아온 집에서 베키가 어느 후작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다. 로던은 베키를 떠난다. 이후 베키는 유럽 각지를 방랑하면서 가는 곳마다 상류사회를 뚫고 들어가지만 추악한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10여 년이 흐른 후 베키는 어밀리어의 오빠인 조지프를 다시 만나 동거하지만 조지프는 죽고, 베키는 보험금을 받기 위해 조지프를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한편 어밀리어는 죽은 남편의 친구이자 자신을 오랫동안 연모하며 10여 년을 지극정성으로 돌봐 준 도빈의 구혼을 받아들인다. 도빈의 지극한 사랑이 어밀리어의 둔감성에 지쳐서 조금 식었을 때였다. 결혼은 기대에 미치지 않았으나 어밀리어가 낳은 사랑스러운 딸이 그의 허무함을 달랜다.
다음 주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