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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의 좌충우돌 육아일기] 남자도 당당히 산부인과에 가고 싶다

입력 | 2013-03-21 03:00:00


이제 딸 셋을 낳고 어엿한 다둥이 가족이 되고 나니 우리 부부에게 어렵고 힘들었던 난임의 경험도 추억으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절이 됐다. 이제는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를 낳기 위해 누가 더 고생했느냐’라는 정답 없는 주제로 행복한 논쟁을 벌이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자가 훨씬 더 고생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보통 시험관(체외수정) 시술은 그 전에 인공수정 시술을 몇 번 시도한 뒤 실패할 경우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과배란 유도를 위한 여러 주사도 맞고 초음파 검사도 자주 진행해야 한다.

주사를 계속 맞는다는 것 자체도 육체적으로 꽤 부담되는 일이지만 맞벌이라면 일하는 중간 중간에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된다. 짬을 내서 병원에 거의 매일 들러야 하는데 이것도 웬만큼 열려 있는 직장문화가 아니고서야 심리적으로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일하다 말고 직장 내 여자 화장실에서 스스로 주사를 놨다고 한다.

이렇게 아이를 갖기 위해 애를 쓰는 세상의 모든 남자는 머리를 숙여야 하리라.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시술 과정에서 여자가 더 고생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100만 배 더.

하지만 남자도 고생한다는 점.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의 과정에서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상당히 스트레스 받는다는 점을 의사들도 잘 알지 못한다. 임신이 잘 안될 경우 남자들도 산부인과에 가야 한다. 이때 병원에서는 난임 원인에 대한 1차 검사로 정액검사를 진행한다. 결과가 나오면, 병원에서는 ‘정자의 수와 운동성이 모두 평균 이하로 문제가 있다’고 결과를 알려준다. 담담하게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대다수 한국 남성은 의료진의 말을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것처럼’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속된 말로 ‘너는 이제 고자다’라는 선언으로까지 말이다. 아마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쉬쉬 책과 비디오로 성지식을 얻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정력에 대한 과도한 환상과 집착, 그리고 남자들끼리 만나 술 한잔하게 되면 ‘발기부전은 죽음이요, 남성다움은 곧 성적 능력’이라는 주제를 안주 삼아 떠드는 대한민국 밤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의사 선생님한테 듣는 “평균 이하네요”라는 말은 “당신 인생 끝났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난임 치료를 받는 남자들이 느끼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뿐만이 아니다. 먼저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시술에 필수적인 정액 추출을 위해서는 난임 클리닉에 마련된 정액검사실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를 안내하고 관리하는 간호사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그분들께 정액 추출 과정과 절차를 안내받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특히 우리 부부가 다녔던 불임클리닉의 정액검사실은 산부인과 진료실 복도의 맨 끝에 위치해 있었다. 좌우에 앉아 있는 임산부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마치 패션쇼장의 런웨이를 걸어가듯이 족히 10m는 걸어가야 하는 구조다. “아니, 아기를 만드는 이 성스러운 시술에 쑥스러워하고 민망해하는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정말 쑥스럽고 민망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더구나 남자의 정액 추출이라는 것이 마치 물총에서 물 쏘듯이 방아쇠를 당기면 쭉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의자 하나와 비디오 하나 달랑 놓인 내부를 보고 ‘오 마이 갓!’을 외칠 만큼 끔찍했다. 심지어 어떤 병원의 검사실은 커튼 하나로 가려져 있어서 건너편 의료진의 대화소리가 다 들리는 경우도 있다. 남자들이 무슨 짐승처럼 야한 비디오 하나 틀어준다고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정서적으로 매우 민감한 존재라는 점을 왜 알아주지 않을까.

남자들이 산부인과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큰 용기를 내야 한다. 가족의 격려도 필수다. 물론 사회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남자들의 인식이 변해야겠고 난임도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되어야겠다. 하지만 조금 더 남자를 배려하는 시설과 운용이 좀 아쉽다.

남자라고 모두 ‘씨수소’는 아니지 않은가.

《 30대 중반의 광고기획자인 필자는 여섯 살 큰딸 보미와 세 살 유나·지우 쌍둥이를 키우는 가장이다. 》

이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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