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IN&OUT]프로야구 열리는 밤마다 도둑질하는 남자의 정체

입력 | 2013-03-22 03:00:00


황규인 스포츠부 기자

그는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 밤마다 도둑질을 한다. 장물(贓物)은 야구 기록. 인터넷 문자중계와 한국야구위원회(KBO) 홈페이지에 올라온 기록지 등을 보고 사설 야구 데이터베이스(DB)를 만드는 게 그가 하는 도둑질이다. 프로야구 LG 골수팬 김범수 씨 이야기다.

시작은 단순했다. 2005년 어느 날 갑자기 이병규의 득점권 타율이 궁금했다. 구단에 문의했지만 KBO에 알아보라는 답변. KBO는 기록 관리를 독점 위임한 회사 ‘스포츠투아이’에 문의해 보라고 답했다. 스포츠투아이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사용료를 요구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기록을 정리하기로 했다.

2년의 시행착오 끝에 그는 100개가 넘는 변수를 조합해 각종 상세기록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하고만 기록을 공유하다 2007년 인터넷 사이트 ‘아이스탯’을 만들어 누구나 무료로 야구 기록을 찾아볼 수 있게 했다.

건설회사 직원이라 ‘새벽반’으로 살아야 하는 그가 매일 2시간 넘게 기록을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경기가 있는 날 지인들과 저녁 약속을 잡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야구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스포츠투아이는 그가 불편했다. 지난해 이 회사는 “일부 개인 사이트에서 문자중계를 (무단) 수집해 사용하고 있다”며 “적절하고도 강력하게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 씨는 고심 끝에 회원수 2만 명에 육박하던 사이트 문을 닫았다.

스포츠투아이 측 주장은 한마디로 야구 기록 저작권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야구 기록을 두고 저작권을 따질 수 있을까.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야구 기록이나 문자중계는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한 게 아니라 단순 사실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저작권이 없다. 저작권 염려 없이 얼마든 가공할 수 있다”며 “단 KBO에서 기록을 모아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한 부분에 대해서는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미국 야구 아카데미 여러 곳에서 연수한 조용빈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야구 기록에 저작권이 없다는 판결이 여러 차례 나왔다. 국내 법원은 비슷한 판례가 없어 위법이다 아니다 말하기는 곤란하다”며 “그런데 야구 경기는 누구나 보고 기록할 수 있다. 스스로 DB를 구축했다는 사실만 입증하면 수익 사업을 해도 문제 삼을 수 없다는 게 일반 견해”라고 말했다.

김 씨는 “LG에 이름이 똑같은 이병규 선수가 두 명인데 문자중계는 이것도 구분하지 못 한다”며 “문자중계가 틀릴 때도 많아 공식 기록지와 중계 영상을 일일이 확인한다. 문자중계만으로는 이런 DB를 구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국내 야구팬들은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류현진의 시범경기 피안타율은 쉽게 찾아도 그의 KBO 통산 피안타율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탈락보다 열혈 야구팬을 도둑으로 몰아가는 이 현실이 750만 관중을 꿈꾸는 국내 프로야구의 슬픈 자화상이다.

황규인 스포츠부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