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감당 못하겠다’ 생각되면 사양할 줄도 알아야”
동아일보 독자위원회는 18일 본사 회의실에서 ‘대치 정국과 새 정부 인사 파동’을 주제로 토론했다. 왼쪽부터 김사중 스탠더드에디터, 박태서 미디어연구소장, 이주향 위원, 이진강 위원장, 김동률 위원, 박제균 스탠더드에디터, 이형삼 스탠더드에디터.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가까이 되도록 제 기능을 못하자 많은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여서 이렇게 오래 지연되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탕평인사 의지가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는데도 밀어붙이는 측면이 나타나는 등 논란도 있었습니다. 여러 논란을 언론이 어떻게 보도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보도하는 게 바람직한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진강 위원장=새 정부 출범에 기대를 한 많은 국민이 실망한다는 주변의 얘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최근 신문을 보니까 정부조직법을 두고 ‘극적 타결’ 같은 표현을 했는데 이건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고 예상치도 못한 부분이 타결되어야 극적 타결인데 용어 선택이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국민을 실망스럽게 하고, 화나게 하고 돌아서게 했던 이런 사태가 왜 일어나나 싶어 아쉽습니다.
김동률 위원=정부조직법은 늘 정권에 따라 새로 만들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는 왜 이렇게 자주 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필요하면 태스크포스(TF)팀을 두면 되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판을 갈아엎는 소모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정부 조직이 바뀌면 명함 간판 값이 얼마고 이런 것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직이 바뀌어야 하는지 진지하고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새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현하려는 데 꼭 필요한 것이면 몰라도, 소모적인 일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짚어 줘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김 위원=조직 자체를 뿌리째 갈아엎는 것은 이분법적으로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 적이 한 걸 바꾼다는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이 위원=예를 들면 동아일보에서도 몇몇 내정자에 대해서도 검증을 통해 비판했잖습니까. 그래도 귀담아듣지 않고 그냥 강행하는 것에 대해 성공한 여성 대통령을 기대하는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도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자신이 한번 결심하면 바꾸지 않는 것에 대해 대통령이 되면 조금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과 충고가 나왔습니다. 앞으로 정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보도해야 할까요.
박제균 스탠더드에디터=인사에 관해서는 박 대통령 잘못이 있습니다. 인사문제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친박계 인사들을 만나면 자기는 말을 못 하니까 언론이 좀 써 달라는 말도 합니다.
김 위원=이건 불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통이 안 되는 게 불통인데 이 정도면 독선과 오만으로도 비칠 수 있습니다.
이 위원장=지금까지 만나는 것이나 대화하는 것을 꺼리는 것을 불통이라 여겨 왔습니다만, 소통의 의미를 한 차원 높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나서 대화한다고 소통이 되는 게 아니고 만나서 대화하면서 양쪽이 양보를 할 줄 알아야 진정한 소통이 됩니다. 양보 없는 대화, 양보 없는 만남이라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링컨이 대법원장을 가택연금하고 정적을 구속하고 해외로 추방하고 권한을 남용했음에도, 노예해방 등 큰일을 할 때는 버릴 줄 알았어요. 그게 바로 소통입니다.
김 위원=언론이 박 대통령에 대해 인내의 범위를 벗어나는 인내를 하고 있지 않나 걱정됩니다. 이쯤 되면 단순히 소통 문제가 아니고, 심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인사에서 보듯 신문이 여러 번 지적했는데도 마이웨이가 심합니다.
이 위원장=국회와 특히 여당 의원들이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얘기도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형삼 스탠더드에디터=동감합니다. 다만 박 대통령이 ‘박정희’라는 배경 때문에 실제보다 더 오만하고 권위적으로 비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박 대통령이 소신을 굽히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언론과 국민은 즉각 ‘박정희’를 떠올리며 과민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독선적 카리스마 때문에 손해 보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박 대통령이 타협하고 양보했다면 ‘여성 대통령이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끌려다닌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여당 내에 2인자 그룹이나 비선 채널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불통’의 이미지를 낳았을 수도 있고요.
박 스탠더드에디터=인사는 다르다고 봅니다. 대통령의 인사가 중요한 건 그 자체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라는 점입니다. 나는 이런 정도 되는 사람을 쓰겠다, 이런 논란이나 흠결 있는 사람은 내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죠. 대통령의 인사가 잘못되면 한국 사회에 잘못된 메시지를 던지게 됩니다.
이 위원=박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약속 지키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수차례 말했고 이미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정부 출범 초기 인사가 중요합니다. 신뢰가 정부를 지탱하는 큰 자산인데, 스스로 허물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습니다.
김사중 스탠더드에디터=누리꾼들은 야당의 발목 잡기, 대통령의 경직된 자세, 대통령 눈치를 살피는 여당의 무능력, 모두를 비판했습니다. 여야가 정부조직법 개편안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는 날치기 강행 통과 안 하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조소 섞인 반응까지 있었죠. 어쨌든 이번 ‘식물정부’ 사태는 대한민국 정치 수준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보여 줬습니다. 협상은 어차피 양쪽 당사자의 양보 없이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한국엔 진정한 정치가 없다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정치의 본질은 국민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되레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고 있는 현실을 정치권은 뼈아프게 반성해야 합니다.
이 위원장=장관 직을 제의 받는 사람도 스스로 생각해서 ‘감당 못 하겠다’고 판단되면 사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사람도 ‘예의염치’가 있어야 합니다. 예는 법도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의는 아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염은 내가 깨끗한지를 스스로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김 위원=공직자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국민의 관점에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위원장=정치는 승패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정치권을 보면 지면 영원히 지고 다 빼앗기는 줄 압니다. 이기면 다 얻은 줄 알고 오만과 독선을 부립니다. 정치권이 승자와 패자에 대한 인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패한 사람을 다독이며 같이 가는 게 승자의 아량 아닙니까.
―최근 동아일보가 주말판 등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내용과 디자인 등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김 위원=주말판은 호흡이 길고 매거진 성격을 띠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 생활 단위가 주말 개념으로 이루어지잖아요. 사람에게 휴식을 주는 추억담 기사 같은 것도 좋습니다.
이 위원=대학생들을 보면 전체 구조를 만들고 통찰력 있게 보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점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전체 구조 속에서 기사를 접하는 것과 인터넷 서핑으로 필요한 부분만 조각조각 보는 것은 다릅니다.
이 위원장=최근 정국과 관련한 문제점을 동아일보가 잘 정리하면 정치권이나 인사권자들에게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 좌담회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석자>
● 위원장
이진강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 위원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이주향 수원대 교수
박제균 편집국 스탠더드에디터
이형삼 출판국 스탠더드에디터
김사중 동아닷컴 스탠더드에디터
● 사회
박태서 미디어연구소장
정리=김동원 기자 daviskim@donga.com
오혜진 인턴기자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