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어떤 분은 원고 청탁서 말미에 일본의 선승(禪僧) 잇큐의 시를 적어 보내왔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보아도 그 속엔 벚꽃이 없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벚꽃이 피는지’라는 시구(詩句)를. 이러한 봄 내음 물씬물씬한 글쪽지를 건네받으니 벙근 꽃망울을 손끝으로 만지는 듯하다. 바쁜 마음에 잠시 짬이 생겨나는 듯도 하다.
아, 그러고 보니 실로 봄이다. 계절이 거꾸로 가나 싶게 꽃샘추위가 남았다고는 하지만 봄비가 잦은 것을 보니 봄이 세상에 확 펴질 기세다.
헤세는 봄을 ‘맑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무함마드 루미는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당신이 안 오신다면,/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당신이 오신다면,/또한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라는 시구로 사랑하는 이의 소중함을 봄빛 넘실넘실하는 과수원에 빗대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성부 시인은 봄을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봄을 끌어안아 맞았다.
이즈음에는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법문도 생각난다. 스님은 매화가 아름다운 때는 반쯤 피었을 때이고, 벚꽃이 아름다운 때는 여한 없이 활짝 핀 때이고, 복사꽃은 멀리서 볼 때 환상적이며, 배꽃은 가까이에서 볼 때 맑음과 뚜렷한 윤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스님의 못다 한 말은 새로 돋고 핀 꽃잎과 꽃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들으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꽃잎과 꽃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의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 자신도 개화한 한 송이 꽃과 같은 하나의 고귀한 생명체라는 전언이 아닐까. 우리가 내심에 평온과 기쁨, 균형, 조화 같은 미덕을 빠짐없이 완전히 갖추고 있다는 전언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꽃 청산을 보면서 가져야 할 춘심(春心)은 우리가 만덕(萬德)을 갖춘 존재임을 바로 알아서 우리 존재에 대한 경이와 감격과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도의 시인 카비르가 노래한 다음의 시구를 읽어보라.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 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이 시구절의 뜻도 우리 몸 안쪽, 우리의 마음이 활짝 핀 꽃이나 다름없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돌아가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권고를 드러내어 나타낸 것이다.
봄의 약동하는 생명력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하나의 에너지이다. 새순의 싹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 탄생은 그저 대단하고 숭고하여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봄 에너지의 특징은 ‘부드러움’에 있다. ‘장자’에서는 봄날의 아지랑이를 ‘야마(野馬)’라고 쓰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한가하게 풀 뜯고 움직이는 야생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아른아른 흘러 다니는 아지랑이를 그처럼 형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흘러 다님에는 격함이 없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요, 온순한 안색이다. 아지랑이가 어디 급하거나 거세던가.
그러나 봄이 왔건만 세상의 인심이 봄이 온 것을 느끼지 못함은 왜 그러한가. 오히려 거칠고 날이 선 말의 포만 시대에 살고 있다. 인심이 야박하고 잇속에 밝다. 분노와 폭력은 일상화되었다. 진영으로 나뉘어 곧 세차게 싸울 기세다. 양보와 화해의 회합이 없다. 인정사정없이 뭇매를 때리고 포격한다.
많은 사람이 밝은 화안(花顔)과 부드러운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사람이 이 봄에 봄꽃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먼저 꽃 피우기는 어려워도 일찍 핀 한 송이의 꽃은 다른 꽃의 개화를 연속적으로 부른다. 그리하여 산빛 전체를 바꾼다. 꽃 천지인 춘심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