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극기지 터가 좋아… 암반활주로 만들면 대박”
남극에 건설 중인 장보고 기지 인근에 탄탄한 활주로를 만들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이동화 대표가 2012년 11월 현장에 섰다.
부산 해운대의 한 토목회사를 찾아갔다. 간판에 ‘남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남극의 수도라는 뜻이다. 대한민국 첫 남극 탐사에 참여해 ‘첫 발자국’을 찍었던 바로 그 청년이 머리가 희끗한 장년으로 앉아 있었다. 남경종합건설, 남경엔지니어링토건의 이동화 대표(55). 손에는 남극의 지도를 쥔 채 시선은 여전히 남극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듯 보였다. 아직도 남극에서 무슨 할 일이 남아서일까.
1차 남극탐사 때 앞세우고 간 깃발과 전남 광주의 한 서예가가 남극탐사 얘기를 듣고 선물 해 준 ‘南極’글씨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동화 대표.
“1983년 제 나이 스물여섯 해양소년단 활동을 할 때 산,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남극탐험 얘기가 나왔습니다. 탐험 하면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만 떠올렸지 남극은 관심조차 없던 시절이었지요. 남극탐험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놀렸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준비작업을 하면서 남극이 극지의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천혜의 땅임을 이미 알았거든요.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가보고픈 마음에 당시 동아일보 같은 신문사, 방송국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어느 날 이런 보도를 본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저희 단장(현 극지진흥회 윤석순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남극탐험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설명을 들은 전 대통령은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1985년 드디어 남극으로 향했죠.”
―첫 탐험은 어땠습니까.
“남극 탐험을 공식으로 인증받기 위해선 산과 바다를 다 탐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팀은 남극대륙에서 가장 높은 빈슨 산을, 또 한 팀은 킹조지 섬(현 세종기지가 위치한 섬) 남극바다를 탐사했습니다. 제 몫은 수중탐사인데 수심 28m 정도까지 세 차례 정도 탐사했습니다. 바닷속에서 갑각류와 성게, 해삼 같은 수중생물을 채집했습니다. 수온이 영하 1도∼영하 2도 정도라 온몸에 특수기름을 바른 뒤 슈트를 입고 입수했는데 그래도 차가웠습니다.”
―당시 탐험대가 남극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 맞나요.
“남극을 탐험해 본 경험 때문에 1987년에는 세종기지 건설을 위한 안전담당관으로 기지건설요원 168명을 인솔해 갔습니다. 1988년 3월에 막상 기지가 완성되고 과학자들이 들어왔지만 남극의 겨울을 지내 본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있는 제가 또 1차 월동대로 이듬해 2월까지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에는 세종기지 부두 건설을 위해, 작년 11월에는 장보고기지 건설 공사를 위해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40여 명의 저희 직원이 저 대신 남극에 있습니다.”
―월동이라면….
“남극은 1년의 반이 여름이고 반은 겨울입니다. 월동을 해봐야 남극의 기후조건, 생태 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월동이 중요한 또 다른 까닭은 1년 내내 상주하기 때문이죠. 현재 남극에서 상주하는 나라는 20개국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는 남극의 바다가 녹는 여름철에만 2, 3개월 연구를 하고 빠져나옵니다. 우리는 현재 30년 가까이 월동기지를 운영했기 때문에 남극에 상주하는 실거주국인 셈입니다. 이는 언젠가 남극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때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왜 남극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직 많습니다.
―남극에 무엇이 있기에 그렇습니까.
“풍부한 수산물과 지하자원, 그리고 땅이 있습니다. 크릴 같은 수산물과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석유, 철, 석탄이 상상 이상으로 많습니다. 미래의 자원이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개발될 것이고 우리도 남극에 기여한 만큼 언젠가 지분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를 떠나더라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민족이 평화적으로 개척한 영토가 남극에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일본은 한일병합이 있던 1910년 육군대위 히라세가 처음 남극을 탐험했습니다. 요즘도 정초에는 NHK가 남극에서 새해를 알리는 방송을 합니다. 우리가 매년 보신각 종이나 치고 있을 때 일본은 매년 국민의 머릿속에 남극에 일본 땅이 있음을 각인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중국은 우리보다 3년 정도 먼저 기지를 설치했고 국력이 회복되면서 러시아연방의 쇄빙선을 모조리 사들이는 등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장성기지에 이어 두 번째 중산기지도 이미 완공했고요. 미국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미국의 맥머도 기지는 하나의 도시를 연상케 합니다. 여름에는 대략 1300명 정도의 인력이 상주합니다. 은행과 카페, 숙박시설, 정부기관을 갖추고 고위 공무원도 수시로 파견하고 있습니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칠레의 경우 아주 건강한 산모를 뽑아 남극에서 출산을 하게 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브로인데 남극 최초의 원주민이 된 셈입니다.”
청년 이동화는 1989년 세종기지 건설을 마치고 2년을 남극에서 살다 국내에 돌아왔다. 남극에 있는 동안 태어난 장남의 이름을 한때 ‘남혁’이라 짓기도 했다. 남극을 혁신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국내에선 실업자 신세였다. 당장 가족을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토건업. 그러다가 2005년 세종기지 부두건설 참여를 계기로 또다시 남극과 인연을 맺었다.
“사실 남극의 토목공사는 기후나 환경 등을 알지 못하면 힘들고 위험할 뿐 아니라 남는 게 없어 일반 건설사들은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극지를 좀 아는 까닭에 뛰어들었지요.”
그는 요즘 다시 남극에 ‘미치고’ 있다.
―남극에 관해 ‘미칠 것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던데….
“남극에는 바다 얼음 위에 비행기가 내리는 해빙활주로와 계곡의 빙판 위에 내리는 빙원활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해빙활주로는 바다얼음이 약해지면 비행기가 내릴 수 없어 두 달 정도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빙원활주로는 눈이 자꾸 녹아 활주로 상태가 불안정한 약점이 있습니다. 남극의 겨울철 6개월은 하루 종일 깜깜해 두 활주로 모두 비행기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남극으로 비행기가 들어갈 때는 날씨가 좋아야 합니다. 가다가 중간지점인 터닝 포인트에서 남극 쪽 일기가 좋지 않으면 비행기를 되돌려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합니까?”
―활주로를 만들자는 얘기입니까.
“제가 만들고자 하는 활주로는 암반 활주로입니다. 지금 우리가 남극에 짓고자 하는 장보고 기지는 미국의 맥머도 기지와는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로 남극의 핵심 부분입니다. 거기는 천운인지 1.8km의 암반 활주로를 만들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곳에 활주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극지연구소 정호성 박사인데 저는 그 주장의 신봉자인 셈이죠.”
―그런데 그게 왜 ‘미칠 듯한 아이디어’입니까.
“우리는 남들보다 100년 가까이 늦게 남극에 들어갔지만 이 활주로가 완성되면 단언컨대 그 100년의 지각을 단번에 만회할 수 있다고 봅니다. 비행기가 사시사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시에 출발하고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은 장보고 기지 활주로가 남극에서 에어 허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콧대 높은 선진국도 일단 우리 공항에 들어왔다가 자기들 기지로 가야 합니다. 그동안 빙원활주로를 가지고 콧대를 세우던 미국도 기술인력 파견 및 시험비행을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비용이나 경제 효과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극지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활주로의 경제 효과는 연간 500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10년이면 5조 원입니다. 남극은 10∼20년 길게 봐야 하기 때문에 그 경제 효과는 더 크다고 봅니다. 그런 경제 효과에 비해 건설비용은 4년간 총 400억 원 정도 소요됩니다. ―남극 얘기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 나이가 60세쯤 됐을 때 극지 박물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동안 11번이나 이사를 다니면서도 남극 관련 자료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습니다. 집안은 물론 회사에도 자료가 가득합니다. 1차 탐험대의 깃발부터 제가 쓴 남극일기, 당시 태극기, 양말,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지 관련 자료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의 남극 얘기는 화수분 같았다. 중간에 말을 끊지 않으면 끝이 없었다. 나중에 죽으면 뼛가루의 반은 고향에 묻고 나머지 반은 남극기지 주변에 뿌릴 거란다. 영혼이나마 남극에서 애쓰는 우리 대원들의 수호신이 되고 싶단다. 첫 탐사에서 자기 발을 찍은 이후 27년. 그는 아직도 그 발을 떼지 않았다.
글·사진 / 부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