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젊은 날 떡 벌어진 어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힘겹게 버티고 선 초라한 어깨만 남았다. 남편, 아버지, 그리고 나이라는 무게를 동시에 짊어진 어깨. 바로 50대 이상 한국 남성, 쓸쓸한 ‘올드보이’의 자화상이다.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 50대 남성이 물끄러미 길 건너편을 바라본다. 평일 한낮 정신없이 돌아가는 도심에서 뒷짐 지고 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햇볕이 따사로운 아침. 뼛속까지 시린 추위는 어느새 갔다. 그리고 찾아온 봄, 3월의 어느 날. 노신사가 브런치 메뉴를 주문한다. 말끔한 양복 차림이다. 1만2000원짜리 연어 샌드위치 세트. 담백한 맛이 좋아 한 달에 서너 번은 먹는다.
주변에 대학생 커플이 보인다. 데이트를 즐기는 모양이다. ‘강남 엄마’도 눈에 띈다. 자녀를 학원에 보낸 뒤가 아닐까. 활기찬 오전, 카페가 요란하다.
그는 퇴직 9년차. 아내는 교회 활동에 바빠 아침밥 차리기조차 귀찮아 하는 눈치다. 여행을 같이 다니고 싶은데, 힘들다며 교회를 빠질 수 없다고 얘기한다. 퇴직 초기 일주일에 한 번씩이던 딸 가족의 방문 역시 한참 뜸해졌다가 손자가 생기면서 횟수가 늘었다. 친정 부모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다. 애를 맡기기 위해서다. 얼마나 다행인가.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손자에게 고마운 이유는 또 있다. 그의 말에 웃어주는 유일한 피붙이다. “와이프나 딸과는 대화가 세 마디 이상 이어지질 않아.” 웃으며 입을 열지만 얼굴에는 그늘이 묻어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의 카페. 김현철 씨(69)는 50분 남짓 자리를 지키다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카페 직원이 조용히 말했다. “곧 또 오실 거예요. 그리고 가시겠죠. 있는 듯 없는 듯 계시다가.”
도처에 묻어나는 쓸쓸함
치과의사가 얼마 전 목숨을 끊었다. 아내에게 남긴 유서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지키지 못해 미안해, 딸을 잘 부탁해…. 이렇게 이어진다. 나를 발견하면 화장을 해서 하루빨리 흔적을 없애 줘. 자살한 사실을 딸애가 알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를 한국 50대 남성의 자화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누군가는 손을 저을지 모른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사례라고. 과연 그럴까.
어느 설문조사에서 대학생 50%가량은 아버지에게 원하는 1순위로 ‘돈’을 꼽았다. 50대 남성 자살률은 같은 연령대 여성의 2배가 넘는다. 동아일보 취재진은 50∼64세 남성 20명을 만나 물었다. 자녀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느냐고. 14명(70%)이 그렇다고 답했다.
자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25명에게 물었더니 부모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다는 응답은 7명(28%)에 그쳤다.
65세 이상 노년기로 접어들면 더 참담하다. 75∼79세 노인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89명. 전체 연령 평균(32.1명)의 3배에 가깝다. 특히 남성 자살률이 심각하다.
취재진은 65세 이상 남성에게 대화할 상대가 없어 외로운지 물어봤다. 응답자 20명 가운데 18명(90%)이 그렇다고 했다.
독일 문학의 거장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노인의 삶을 ‘상실’로 표현했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5가지(건강, 돈, 일, 친구, 꿈)를 잃는다는 의미. 한국 노년 남성 가운데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국의 ‘올드보이’는 슬프다.
은퇴를 눈앞에 둔 중장년 남성은 가족과의 소통 단절로 외로움을 호소한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중년 남성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을 뿐 마음으로 운다”고 했다. 노년 남성의 외로움은 보다 본질적이다. 인생의 황혼기에서 오는 쓸쓸함이 엄습한다.
고독한 올드보이의 자화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음식점, 산책로, 영화관. 심지어 댄스 클럽에서도….
상영관에서 나오는 관객의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대놓고 훌쩍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는 진한 여운에 자리를 뜨지 못했다.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의 CGV영화관. ‘7번방의 선물’이 끝난 뒤였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감동적이란 호평과 진부하다는 악평이 공존한다. 평가야 어떻든 많은 사람이 눈물을 쏟았다. 1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취재진은 같은 시간대 영화를 보고 나온 남성 68명을 만났다. 10∼20대 22명, 30∼40대 23명, 50∼60대 15명, 70대 이상이 8명.
영화를 보며 울었는지 이들에게 물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50대와 60대가 가장 많았다. 15명 가운데 13명(87%)이 그렇다고 했다. 그 밖에 10∼20대 50%, 30∼40대 65%, 70대 이상 63%가 같은 답을 했다. 심현섭 씨(53·택시운전사)는 “울음소리를 참느라 애먹었다. 티슈를 챙겨 가지 않아 소매가 흥건히 젖었다”며 훌쩍거렸다.
영화 몰입도 역시 50대와 60대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최저 1점, 최고 5점을 기준으로 평균 점수를 냈더니 4.3점이 나왔다. 70대 이상이 3.4점으로 2위.
회사원 정기준(가명·51) 씨. 몇 년 전까지 영화를 보다 운다는 걸 상상도 못했다. 세 번 보면 한 번은 졸았단다. 그런 그가 요즘 액션영화를 보다가도 울컥한다. “모르겠어요. 정신없이 회사 생활을 할 땐 못 느끼다 가끔 영화관에 오면 기분이 묘해져요. 캄캄한 어둠 속에 나만 남겨진 느낌? 괜히 기분이 센티해져서 감정이 고조되죠.”
아내와 함께 7번방의 선물을 봤다는 박영진 씨(60·공무원). 그는 흐느꼈다. 흑흑거리며 울다가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그를 아내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단다. 박 씨는 민망해서 황급히 눈을 돌렸다고. “나이 들어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그런가. 눈물이 많네요. 반대로 아내는 점점 더 씩씩해지는 것 같고.”
서울 종로구의 허리우드 극장엔 ‘실버영화관’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노인은 2000원이면 영화를 볼 수 있다.
취재진이 이곳을 찾아간 8일 오전. 70대 노인들이 매표소 앞을 서성였다. 대부분 베레모를 쓰고 점퍼와 면바지를 입은 차림이었다.
그중 한 명인 이재광 씨(74)는 액션영화 마니아다. 4남매 가운데 첫딸(46)이 시집을 못 가 안타깝다고 했다. 아내는 고혈압으로 4년 전 세상을 떴다. 그는 자녀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용돈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집에 있으면 울화통이 터져. 영화 보면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좋아. 머리 비우기엔 때리고 부수는 액션영화가 딱이지.”
영화관을 찾은 70대들의 생각은 이 씨와 비슷했다. 영화를 보면 시간이 잘 가서 좋다고, 또 답답한 현실을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어 행복하다고.
탱고에 취한 올드보이
바깥 공기는 여전히 싸늘한데 이곳은 자정 넘어서까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다. 스텝을 밟는 이는 50명가량. 절반은 남성이다. 여성은 20대와 30대가 많은 반면 남성의 대부분은 40대와 50대. 60대도 꽤 눈에 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댄스클럽 ‘엘땅고’의 풍경이다. 스페인어로 엘(el)은 정관사 남성 단수형, ‘땅고’(tango)는 탱고.
남성들의 진지한 표정은 영화 주인공 못지않다. 발끝에서 묻어나는 느낌 역시 이미 프로 댄서.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주인공 프랭크(알 파치노)는 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만난 낯선 여인과 탱고를 춘다. 절망에 신음하던 퇴역 군인이었지만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20대 청년이 부럽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또 우아했다.
엘땅고에선 아르헨티나 탱고를 춘다. 댄스스포츠 종목 가운데 하나인 인터내셔널 탱고는 다소 엄격한 형식과 정해진 룰이 있는 반면, 아르헨티나 탱고는 자유분방한 게 특징. 인터내셔널 탱고에선 파트너를 ‘잡고’ 추지만 아르헨티나 탱고에선 ‘껴안고’ 춘다.
탱고는 2000년경 국내에 보급됐다. 동호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저변을 넓혀 현재는 수만 명이 즐긴다. 특히 그 중심에 50대 남성이 있다. 올드보이들이 ‘탱고 전도사’를 자청하는 이유가 뭘까.
아르헨티나에는 ‘쓸쓸한 자들이여, 탱고를 추라’는 말이 있다. 탱고 리듬에서 느껴지는 비장미와 애틋한 선율은 한국적인 한의 정서와 닮았다. 그래서일까. 탱고를 추다 보면 마음의 공허함과 쓸쓸함이 ‘힐링’된다는 이가 많다.
문화평론가인 하재봉 씨(56)는 수준급 탱고 댄스 실력을 자랑한다. 탱고를 추는 바인 ‘아트탱고’를 직접 운영한다. 그는 “처음 탱고를 배우러 오는 사람의 95%는 혼자 온다. 슬프고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이 많다”고 했다. 특히 마음이 공허한 50대 남성들이 탱고의 진한 맛에 푹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
탱고를 배운 지 반년쯤 된 회사원 신왕기(가명·55) 씨는 사람 만나는 게 좋아서 스텝을 밟는다. “언제 정리될지 모르는 시기잖아요. 애들은 대학에 들어가 학자금 대기도 빠듯한데. 그래서 영혼을 내놓고 일하다 보니 회사에선 마음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요. 집에 가면 지쳐 쓰러지다 보니 또 공허하고. 탱고를 추면서, 여성들과 몸을 접촉하면서 ‘살아 있다’고 느끼죠.”
일부에선 올드보이들이 탱고에 열광하는 이유를 ‘권위론’으로 설명한다. 무슨 말일까.
학자들은 한국 중년 남성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로 권위의 상실을 꼽는 경우가 많다. 남성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정유성 서강대 교수(교육문화학)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으로서 의무는 동일하다. 그런데 권위만 사라졌다. 그게 중년 남성이 슬퍼진 이유”라고 했다. 그렇게 직장, 가정에서 소외되면서 올드보이가 고독해졌다는 얘기다.
남자는 여자를 리드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을 회복한다. 잃어버린 권위를 잠시나마 탱고가 찾아주는 셈이다. 하재봉 씨는 “탱고는 남자가 에너지를 만들어내 여자에게 전달한다. 배우기도 남자가 10배는 더 어렵다. 그 대신 그만큼 성취감도 크다”고 강조했다. 한 50대 남성은 힘주어 말했다. “키, 외모, 나이 다 필요 없다. 탱고만 잘 추면 파트너가 서로 추자고 줄을 선다. 죽어라 연습하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50대 남성이 이렇게 정당하게 대우받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래서 탱고가 좋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일에 바친 청춘, 그리고 다가가니 가족은 없다
두 아이가 있다. 민지(가명)는 열일곱 살, 은지는 세 살.
오전 6시. 은지와 산책을 나간다. 민지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민지와도 가끔 산책은 한다. 일요일에. 하지만 50m가 고비다. 몇 마디 대화만 오가다 조용해진다. 아이는 세 발짝쯤 뒤처져 스마트폰만 본다. 민지가 가끔 던지는 세 마디 중 두 마디는 불평. 그나마 용돈 얘기를 할 때만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낸다.
도통 민지와는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분명 같은 말을 쓰는데, 17년이나 함께 살았건만 벽이 느껴진다.
은지는 솔직하다. 비밀이 없다. 좋으면 좋다고 표현하고, 스킨십도 자주 한다. 서로 말은 못 알아듣지만….
퇴근 시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설 때도 은지가 가장 먼저 반긴다. 귀찮다고 떼놓을 때까지 곁을 지킨다. 민지는? 잠깐 방문을 열고 ‘0.5초’ 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휙 들어가 버린다. 그 뒤론 얼굴 보기 힘들다.
은지에게 드는 돈은 한 달에 10만 원 수준. 민지에겐 월급의 3분의 1 넘게 쏟아 붓는다. 그래도 아내는 불평이다. 더 비싼 학원에 보내지 못해 불안하다고.
공기업에 다니는 배인수(가명·52) 씨는 말했다. 민지는 고2인 딸이고, 은지는 몰티즈 애완견이라고. 그는 “은지는 집에 온 지 석 달 만에 정이 푹 들었는데, 어떻게 민지랑은 갈수록 어렵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무원이었던 배 씨의 아버지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아버지 말에 토를 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4남매 중 맏이였던 배 씨는 그게 싫었다.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가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지금은? 퇴근해 잠깐 스포츠 중계를 보다가 공부하던 민지가 방문을 걷어차면 조용히 볼륨을 줄인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장거리 전화 한 통 하면서 아내 눈치를 본다. 잠자리에서 주도권을 잃은 지 오래. 펑펑 쏟아 붓는 민지 사교육비 얘기를 입에 담는 일은 금물이다. 권위적인 아버지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꿈꾸던 자상한 아버지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아프다. 하지만 건강검진 수치를 애써 무시한다. 회사를 휴직하고 쉬자니 엄두가 안 나서다. 제대로 검사를 받으면 죽을병이라는 진단이 나올까 봐 병원 가는 게 두렵단다. 노후 준비는 머릿속으로 그림만 그려본다. 5년째다. 손에 쥔 마이너스통장은 어깨를 짓누른다. 평균연령 80세? 70세까지 산다 해도 도무지 답이 안 나올 거 같다.
얼마 전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퇴하고 시골에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바로 짜증 섞인 한마디가 돌아왔다. “민지 대학은 어쩌고!” 덕분에 민지에겐 물어볼 필요도 없어졌다. 한숨을 길게 내쉰 배 씨는 혼잣말을 했다. “이젠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TV 광고가 있다. 아빠가 어린 딸을 안아주려다 “징그럽다”는 핀잔을 듣는 내용. 충격을 받은 아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왠지 서글프다. 그만큼 이 광고에서의 장면이 올드보이의 자화상과 맞닿아 있다.
올드보이의 쓸쓸함은 가족과 떼놓을 수 없다. 인제대 서울백병원의 우종민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아내와의 마찰, 자녀와의 단절, 그리고 가장으로서 과도한 책임감이 트라이앵글처럼 가장들 가슴에 콱 박혀 이들의 쓸쓸함을 부채질한다”고 진단했다.
특히 중장년 올드보이를 힘들게 하는 건 자녀와의 관계. ‘꽃다운’ 30대를 일에 바치고, ‘성숙한’ 40대를 회사 선후배와의 관계에 바친 그들이 50대가 돼 자녀를 돌아볼 때쯤엔 이미 늦다. 훌쩍 커버린 자녀는 품에 없다. 자녀들은 “이제야 아빠 없는 생활에 적응했는데 갑자기 다가오면 혼란스럽다”며 거리를 둔다.
취업 포털 커리어는 직장인 445명을 대상으로 가족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조사했다. 하루 평균 30분이 안 됐다. 10분 미만이라는 답변도 31.5%에 달했다.
동화약품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초중고교 재학생 자녀를 둔 부모 800명에게 물어본 결과, 가족끼리 모여 식사할 때 대화를 나누는 비율은 27.5%에 그쳤다. 고교생 자녀를 둔 가정의 27%는 최근 일주일 안에 가족이 모여 식사한 횟수가 2회 이하라고 답했다.
아내는 내 거울… 자는 모습 보면서도 미안하고 울적해
심주선(가명·50) 씨는 자신을 운전기사라고 했다. 가족과 외출할 때 운전대를 잡는다는 말이다. 아내와 고3인 딸은 그에게 말도 붙여주지 않는다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괜히 집안일에 대해 한마디하면 따가운 눈총이 돌아온다.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무슨 참견이냐고. 특히 교육 문제를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딸아이는 “알지도 못하면서”란 짜증 섞인 한마디를 던진 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섞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심 씨에겐 이러한 상황이 억울하고, 답답하고, 또 미안하다. “보통 밤 10시 넘어 퇴근하니 아내와 딸이 자는 모습만 봤어요. 대화할 시간이 없었죠. 그러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숙녀가 돼 있었고. 이제 와서 딸애와 무슨 얘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관이다.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까.
일단 문제를 알아야 치유가 가능하다. 그래서 취재진은 대화 능력을 측정하는 테스트부터 해봤다. 이정명 한국타말파연구소 대표가 도움을 줬다. 이 대표는 중년 남성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했다. 상담 등 각종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심리 치료 전문가.
심 씨는 ‘호통 스타일’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항상 업무에 쫓기고 실적 압박을 받다 보니 후배에게 호통을 많이 쳤다. 회사에서 ‘심핏대’로 불렸던 이유. 가족과의 대화에서도 욱하는 성질은 고스란히 이어졌다. 감성적인 설명보다 감정적인 발언이 폭발하니 대화가 10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막힌 귀도 문제로 드러났다. 들어주기 영역에서 A가 최상, E를 최하라 할 때 그는 D를 받았다. 보통 성인 평균이 B 정도임을 감안하면 소통장애 수준이다. 심 씨는 “우리 세대는 ‘낀 세대’다. 급변하는 사회의 정점에서 앞만 보고 달려오지 않았느냐. 들을 시간도 없었고, 듣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 대표는 일단 자신 속에 내재한 불안을 스스로 깨치는 게 선결 과제라고 했다. 최근 치료받은 50대 남성을 보자.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치료 센터에서 일단 편하게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했더니 눕고선 팔다리를 휘저으며 펑펑 울더라고요. 여유가 필요했다면서. 회사와 집에서 항상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안고 사니 정작 본인을 위한 공간이 없었던 거죠.”
한국 올드보이의 키워드는 불안이다. 항상 불안을 기제로 이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자식과의 대화도 급해진다. 아빠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며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데 훈계부터 앞서니 대화가 이어질 리 만무하다.
어떻게 불안을 누를까. 이 대표는 명상을 권했다. 또 몸으로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다. “머리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혼자 속으로 삭이지도 말고요. 그 대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일기를 써 보세요. 생각한 걸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중장년층 남성에게 자식과의 관계가 최대 고민이라면, 이미 자식이 출가했을 가능성이 높은 노년층 남성에겐 아내와의 관계가 더 어렵다.
일단 노년층 올드보이는 아내의 잔소리에 불만이 많다. 취재진이 만난 65세 이상 남성 20명 가운데 13명이 아내에 대한 불만 가운데 1위로 ‘잔소리’를 꼽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실질 은퇴연령은 71.4세.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높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내에게서 무시받지 않기 위해, 또 잔소리가 듣기 싫어 악착같이 일하는 경우도 많다.
여성은 나이가 들어도 활동 반경이 넓지만 그렇지 못한 남성은 위축된다. 신동훈 씨(72)는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며 답답해한다. 하지만 잔소리가 심해질수록 내 입은 더욱 닫히게 된다”고 토로했다.
노년층은 또 다른 이유로 아내와의 관계에서 슬퍼진다.
이무성(가명·67) 씨는 열심히 살았다. 베트남전에도 참전했고, 구의원으로 3선까지 했다. 지금은 노인종합복지관 등을 다니며 한국 근대사와 건강, 금연을 주제로 강연을 한다.
그런 그가 최근 아내와의 잠자리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정확히는 잠들기 전, 먼저 잠든 아내의 주름살을 보면서 울적해졌다. ‘신혼 땐 참 곱고 예뻤는데.’ 물가엔 신경도 안 써 평소 좋아하던 삼겹살 한 근이 얼마인지도 몰랐던 그였다. 본인만 생각하며 살았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미안했다. 며칠 전, 아내와 막걸리를 한잔할 때도 콧등이 시큰해졌다. 잔을 주고받는 내내 그랬다.
아내의 얼굴을 볼 때면 거울 앞에 선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저렇게 나이가 들었나.’ 인생무상이 느껴져 슬프다고 했다. “이유가 있나. 늙었으니 우울하지. 내가 아내를 저렇게 만들었나 싶어 미안하고….”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중장년층 남성들이 팀을 이뤄 자전거를 타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올드보이가 웃다
올드보이의 얼굴에 그늘만 드리워진 건 아니다.
신(新)중년. 요즘 50대 남성을 부르는 새로운 말이다. 김종민 씨(55·자영업)는 “20대의 호기심, 30대의 역동성, 40대의 원숙함을 모두 갖춘 게 50대”라면서 “앞으로 30년은 더 살 테니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에도 딱 좋은 나이가 50대”라고 말했다.
자기 관리는 신중년의 새로운 트렌드다. 그동안 자녀에게만 퍼주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이가 늘었다. 중년 남성이 쇼핑의 ‘큰손’으로 등장한 게 대표적 증거다. 몇 년 전부터 백화점은 패션에 관심 많은 중년 남성을 타깃으로 전용 매장을 앞다퉈 열었다.
미용에 관심 있는 50대 역시 늘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고급 헤어살롱 직원은 “중장년층 고객이 꾸준히 증가했다. 2, 3년 전만 해도 50대 아저씨는 그냥 짧게 깎아 달라 했다. 요즘엔 다르다. 30% 정도는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을 정확히 표현한다”고 전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이미경 팀장은 정체성을 찾는 50대 남성이 서서히 늘어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엿봤다.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남성은 가슴이 잘 안 열린다. 그래서 가족과의 관계에 어색함을 느낀다. 하지만 최근엔 ‘나는 누구인가’를 자주 생각하고, 스스로를 아끼는 남성이 많아졌다. 외로움 극복의 첫 실마리를 풀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박병용 씨(53·회사원)는 얼마 전 딸로부터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많이 나눈 덕분이다. 그래도 헛살진 않았다는 생각에 뿌듯했다는 박 씨. 그도 자기와의 소통을 강조했다. “빨간 안경을 끼고 있으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입니다. 일단 나를 모르면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할 수 없어요.”
긍정적인 변화는 노년층에서도 감지된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위치한 호텔식 실버타운인 ‘더 클래식 500’. 입주자 대부분은 70대다. 정확히 말하면 ‘액티브 시니어’다. 운동하고, 공부하고, 여가생활을 즐기느라 바쁘다. 한 입주자는 “일본에선 매년 2만 명 넘는 노인이 고독사(孤獨死)한다고 들었다. 이곳에선 고독할 겨를이 없다. 바깥 일 할 때보다 스케줄이 더 빡빡하다”며 웃었다.
고소득 노년층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니다. 더이상 외롭지 않다고 외치는 올드보이가 늘어난다. 등산, 골프, 악기 연주, 자전거 타기, 사진 찍기 등 늘어난 여가 활동이 이들의 공허함을 달래주는 매개체다. 애완견과 화초를 기르며 슬픔을 극복하는 ‘실버 올드보이’도 많다.
에릭 클라이넨버그 교수(뉴욕대 사회학과)는 저서인 ‘고잉 솔로: 싱글턴이 온다’(더 퀘스트)에서 “싱글족의 증가는 시대의 당연한 흐름이다. 혼자 사는 게 슬프고 외롭다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주장했다.
다소 앞서 나간 이론일까. 취재 과정에서 만난 78세 노인의 얘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누라랑 10년 전 사별했어. 그래도 잘 지내. 잘 먹고, 잘 놀고, 주위에 사람도 많고. 난 은퇴하자마자 좋든 나쁘든 뭐든 꾸준히 배우고 살았어. 그냥 마누라한테 기대고 살았으면 나도 진작 저세상으로 갔겠지.”
에필로그
신사동 가로수길의 카페를 며칠 뒤 다시 찾았다. 김현철 씨가 보였다. 손엔 다이어리가 없었다. 염색을 했는지 흰머리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큰아들이 있는 호주로 간다고 했다. 대충 얘기가 됐던 일이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틀 전 아들 내외와 연락하며 출국 시기를 정했단다. 일단 1년을 생각하고 가는데 다음 달 출국이라 준비할 게 많다고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그는 자리를 떴다. 며칠 전 봤던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카페에서 담아 가는 건 쓸쓸함일까, 그리움일까.
신진우·김도형·이샘물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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