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땐 의병 거점, 평화시엔 학문의 요람■ 국립경주박물관 ‘조선시대의 경주’전
신라 패망 뒤 경주는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소용돌이의 진원지이자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이 융성한 지역으로 변모했다. 조선 18세기 지도집 ‘여도(輿圖)’에 실린 경주부(위 사진)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보관하던 경주부윤의 투구와 갑주(아래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 왕조가 기울어갈 때 경주는 꿈틀거렸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 경주는 ‘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찬란한 문화를 뒤로한 채 역사에 묻힌 옛 도읍(都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사료를 살펴보면 경주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사건이 많았다.
피 맛을 본 탓일까. 경주는 이후 잦은 항쟁의 거점이 됐다. 1190년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1199년 김순(金順)이 주도한 농민군의 난, 1202년 경주 별초군의 난, 같은 해 이비(利備)·패좌((발,패)佐)의 난, 1233년 최산(崔山)과 이유(李儒)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선 이를 통틀어 ‘동경(東京·동쪽 서울) 민란’이라 부를 정도다.
조선말 경주는 또다시 격변의 중심에 선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와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모두 경주 출신이다. 몰락 양반의 서자로 태어난 최제우는 세도정치와 외세의 혼란 속에서 1861년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내세운 동학을 창도했다. 전국으로 세를 불린 동학은 1894년 반봉건 농민항쟁의 뿌리가 됐다. 최효식 전 동국대 교수는 “경주는 지식인은 물론이고 민초까지 옛 수도의 후손이란 자부심이 강해 사회적 모순에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경주를 ‘반역의 성지’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13세기 고려시대 몽골 침입이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 때마다 수많은 지역 의병이 분연히 일어나 적과 맞섰다. 1592년부터 2년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대와 4차례나 공방을 주고받은 ‘경주성 전투’는 대표적인 사례다. 허형옥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경주 의병의 정신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져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했다”고 말했다.
○ 신라부터 이어진 학문의 향취 드높아
고려, 조선시대의 문화유산도 적지 않다. 고려시대 불경인 ‘불설아미타경’ ‘달마대사관심론’과 충목왕 때 권보(權溥)와 아들 준(準)이 엮은 ‘효행록’이 경주에서 간행됐다. 고려 현종 3년(1012년)에 쌓은 경주읍성(사적 제96호)은 경주가 행정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 유적이다.
조선에 들어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이 발전했다. 1561년 설립한 서악서원(경북 기념물 제19호)과 1672년 창건한 옥산서원(사적 제154호)이 대표적이다. 서악서원은 신라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봉안했고, 옥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와 함께 ‘동방 사현(四賢)’으로 칭한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을 모셨다. 향토사학자인 조철제 경북문화재위 전문위원은 “경주의 유학적 성취는 이후 남인 계열이나 서호학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경주 출신은 아니지만 매월당 김시습과 추사 김정희도 이 지역과 인연이 깊다. 김시습은 1465년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썼다. 경주 김씨인 김정희는 신라 금석문에 관심이 커 여러 차례 경주를 방문해 저술을 남겼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