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수석논설위원
2년 전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러시아 정부 관계자들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 “두 나라는 국경의 상당 부분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단지 지리적 요인 때문에 각별한 사이로 지내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러시아는 지난해 5월 극동개발부라는 정부 조직을 신설했다. 올해 2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 러시아 대표로 참석한 인사는 극동개발부 장관인 빅토르 이샤예프였다. 러시아는 정체에 빠진 유럽보다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아시아 쪽에서 성장 동력을 얻으려 한다.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아시아 쪽에 판매해 얻는 자금으로 극동 지역에 첨단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동아시아 경제를 손에 쥐고 있는 중국과 원활한 관계가 유지되지 않으면 러시아의 극동 개발은 어려워진다.
19세기 후반 중국이 ‘종이호랑이’로 전락했을 때 러시아는 만주를 손에 넣었다. 이때 러시아 내부에서 등장한 이론이 ‘가축론’이다. 중국을 단번에 쓰러뜨릴 것이 아니라 가축처럼 오래 사육하면서 최대한 이익을 얻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러시아가 극동에 건설한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쪽을 정복하라’는 뜻이다. 극동 장악을 위한 러시아의 최종 목표는 조선 획득이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해 부(富)를 얻었듯이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일본은 조선을 얻어 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막는 ‘방파제’로 삼으려 했다. 러일전쟁은 서로 조선을 차지하겠다며 벌인 충돌이었다. 20세기 초 우리의 국권 상실은 조선 지배층의 무능함 이외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불가항력적인 측면도 작용했다.
우리가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가는 한, 국가 운명을 위해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한때 ‘가축’에 비유되던 중국은 긴 잠에서 깨어난 뒤 러시아의 집중 구애를 받을 만큼 막강한 존재로 부활했다. 중국은 2020년이 되기 전에 경제 총량 면에서 미국을 능가해 세계 1위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바다 건너 일본은 누가 뭐래도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유지하면서 문화 등 소프트파워 면에서 선진국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중국 러시아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는 일본은 미국과의 연대 전략으로 맞설 것이다. 미국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국익 차원에서 ‘거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로 나서고 있다. 한반도는 여전히 이들의 이익이 충돌하는 최전선이다.
한국의 경쟁 상대는 1960년대만 해도 북한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경제적으로 우리를 앞섰던 북한에 맞서 생존 차원에서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일본에만큼은 우리가 질 수 없다는 투쟁심이 경제적 위상을 키운 측면도 있었다. 지금은 중국에 러시아까지 직접적인 경쟁 상대가 더해진 상태다.
몇 해 전 어느 정치인은 “우리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 정도에 머물더라도 성장보다는 전 국민이 고르게 사는 쪽이 더 낫다”는 주장을 폈다. ‘평화’와 ‘반전(反戰)’을 외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주변국이 저마다 부국강병에 매달리는 가운데 우리만 순진한 이상주의에 빠져 있으면 국가의 장래를 지킬 수 없다. 이웃 나라와 국력 격차가 벌어지면 조선조 말의 비극을 다시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외부 여건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가야 할 숙명을 안고 있는지 모른다. 외국인들은 어제 3주기를 맞은 천안함 폭침이나 북한의 핵 실험 같은 외부 위협에 대해 우리가 보이는 태평스러움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요즘 한국 사회에 절실한 것은 현실 감각과 위기 대처 능력이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