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21일 대법원은 사상 최초로 재판과정을 텔레비전이 생중계토록 했다. 가히 혁명이라 할 만하다. 폐쇄적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져 온 한국의 사법부, 그중에서도 대법원이 가장 먼저 자신의 속살을 온 천하에 내 보였으니 말이다.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최고 법원이 솔선수범한 의미는 크다. “설마 텔레비전으로 국민들이 지켜보는데 막말을 하거나 졸지는 않겠지….” 그동안 판사들의 오만방자함에 실망하고 분노해 온 국민들은 조금은 안도하면서 한줄기 희망을 가질 것이다.
“법정에 카메라가 들어오는 것을 보는 날은 그것이 나의 시체를 넘어가는 날이 될 것이다.”
데이비드 수터 미국 연방대법관은 1995년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극렬하게 연방대법원의 언론 공개를 반대했다.
소냐 소토메이어 대법관은 2009년 인사청문회에서 “법정 카메라 실험 참여를 권유받았을 때 흔쾌히 참여했다”며 허용을 찬성했다. 하지만 올 1월에는 “(텔레비전 중계를 보더라도) 미국 사람 대부분이 연방대법원의 변론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국민들의 무지함을 핑계 대며 태도를 바꿨다. 바깥에선 법정 카메라의 당위성을 설파하던 이들도 연방대법관이 되기만 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81년 형사재판에 대한 텔레비전 방송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피고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많은 주에서 텔레비전 재판을 지지하는 암묵적 메시지로 간주됐다. 그러면서 연방대법원은 정작 자신을 드러내라는 의회나 언론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검토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법정 카메라를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명분은 원․피고는 물론이고 증인과 배심원들이 카메라의 존재감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증인도, 배심원도 없이 재판하는 연방대법원은 전혀 흔들림 없이 카메라를 거부하고 있다. 오직 대법관들 의견과 변론의 녹음만 공개할 뿐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2012년 1월 “국민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재판의 전 과정에 텔레비전 중계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겨우 1년여 만에 생중계 허용이 이뤄졌다. 그전에는 거의 논의와 연구를 하지 않았던 한국의 법원이 지난 1년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에 이르렀는지 알 수는 없다.
영국은 1925년부터 법정에서 촬영을 금지했다. 그러나 변호사총회는 1년여의 연구와 조사 끝에 1988년 형사재판법을 고치기 위한 실험 연구를 제안했다. 텔레비전 카메라를 법정에서 배제하는 어떤 합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침내 2004년 대법원은 부작용을 살피기 위한 실험 재판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20여 년 동안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대법원은 2009년 재판 공개를 시작했으며, 정부는 2011년 하급법원에 대한 카메라 촬영 금지를 해제했다.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한국 대법원은 전광석화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할 만하다.
마땅히 해야 할 조치라면 그것이 빨리 이뤄졌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지도자의 고독한 결단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개혁이다. 양 대법원장이 과감하고 신속하게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개혁이 법정의 카메라 허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사법부가 사회 어느 곳보다 변화에 더 둔감한 조직이라고 평가받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광범위한 여론 수렴과 연구, 실험 등이 없는 조치가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릴지는 두고 봐야 한다. 50개 주 모두가 전면 또는 일부 법원에 대해 카메라 진입을 허용하고 있음에도 연방법원들은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법관들의 의식과 문화를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이 미국처럼 1심 법원에서부터 카메라 허용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한국 특유의 법관 의식이나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양승태 개혁’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다른 나라처럼 하루빨리 1심 법원 등에까지 허용 조치를 확대해야 한다. 법정에서 기자들의 개인 컴퓨터 사용은 말할 것도 없고 소셜미디어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동료 대법관들이 동참했듯이 한국의 법조계 전체가 그의 개혁을 성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가 가는 길이 외로운 길이 아니길 빈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