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공학자가 된 교통공학자… 신부용 KAIST 겸직교수
신부용 KAIST 겸직교수(왼쪽)가 27일 대전 유성구 대학로 KAIST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장주희 연구원(왼쪽에서 두 번째)과 베트남 학생들에게 ‘샞스(HUPS)’에 대한 의견을 묻고 있다. 신부용 교수 제공
“이분을 겸직교수로 모시고 연구소도 하나 마련해 드립시다.”
총장의 약속은 1년 후 지켜졌다. 초빙교수의 명함에는 ‘KAIST 문화과학대학 겸직교수 겸 한글공학연구소장’이라는 직책이 새겨졌다. 신부용 KAIST 겸직교수(70)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제 세상과 다시 부딪쳐 볼 차례였다.
신 교수는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교통공학 전문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1981년 시스템공학센터 내에 신설한 교통연구부를 그에게 맡겼다. 교통연구부는 1986년 KIST에서 독립해 교통개발연구원이 됐고 그는 부원장과 원장을 지냈다.
1995년 1월 그는 동아일보에 ‘한글의 국제화’라는 칼럼을 실었다. 훈민정음 28자를 모두 활용하자는 주장이었다. 교통개발연구원장이 웬 한글 타령이었을까. 사실 그의 한글 사랑은 캐나다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인들이 영어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B와 V’, ‘F와 P’ ‘L과 R’ 발음의 구분이었다. 그때 순경음에 생각이 닿았다. 훈민정음에 있던 순경음만 되살린다면 그런 발음을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없어진 순경음은 입술을 거쳐 나오는 가벼운 소리로 V, F, R 발음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외래어 표기법 쪽에 주로 관심을 두던 그는 1996년 아예 독창적인 한글 자판을 만들기도 했다. 삼성전자 ‘천지인’, LG전자 ‘나랏글’과 차별된 부분은 ‘ㄱ’와 ‘ㅎ’을 합쳐 ‘ㅋ’을, ‘ㅂ’과 ‘ㅎ’으로 ‘ㅍ’을 만드는 식이었다. 순경음 표기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자판구조는 1996년 ‘실용신안’으로 등록됐다.
그러나 현실이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실용신안 특허를 갖고 기업들을 찾아갔지만 “우리 회사에서 투자하긴 힘들다”는 말만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훕스(HUPS)’의 기본 원리는 한국어든 외국어든 발음 그대로를 한글로 입력하면 그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아준다는 것이다. 업데이트가 계속되면 단어뿐만 아니라 문장 번역도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신부용 교수 제공
그의 한글 연구에 다시 불을 지핀 사람은 서남표 전 KAIST 총장이다. 그는 KAIST 한글공학연구소장 명함을 갖고 이석채 KT 회장을 찾아갔다. 이 회장의 제의로 그는 KT 임직원 300명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했다. 며칠 뒤 KT가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2010∼2012년 3년간 4억5000만 원을 들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바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훕스(HUPS)’다.
훕스는 ‘Hangul-based Universal Phonetic System’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쉽게 말해 한글을 활용한 다국어 번역기다. 이 애플리케이션의 입력 화면에 한글로 ‘세임’이라고 넣으면 ‘같은’이란 뜻과 함께 ‘same’ ‘同一的’ ‘同じ’ 등 4개 언어의 단어가 동시에 검색된다. 신 교수는 “이 기술은 한글이 글자와 소리가 일치하는 유일한 언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며 “단어뿐 아니라 곧 문장 번역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KAIST에 유학 중인 베트남 학생 2명과 함께 베트남어를 훕스에 추가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에 온 다문화 여성들 중 베트남 출신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이 연구를 시작했다. 다음 목표는 시각장애인에게 ‘문자’를 선물하는 것이다. 한글이 발음 나는 모양을 흉내 내 만든 글자인 만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