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쟁론] 대마도 불상 2점 반환 논란
▼ 금동관음보살좌상 만큼은 반환 미루고 조사를 ▼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한국미술사연구소 소장
첫째, 복장에서 나온 조성기에는 ‘서산 부석사 당주로 조성해 영원토록 봉양하기를 서원한다’는 내용만 기록돼 있을 뿐 ‘쓰시마 섬 관음사로 이안(移安)한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만약 쓰시마 섬 관음사에 봉안하고자 부석사에서 주조했다면 ‘무슨 이유로 이안한다’는 내용을 조성기에 남기는 것이 원칙이다. 즉 역대 모든 불상 조성기에는 어느 사찰에서 조성해 다른 사찰에 이안할 경우 반드시 ‘○○사찰에서 조성해 ○○사찰로 이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따라서 이 관음보살좌상이 정상적으로 관음사에 기증 또는 이안됐을 개연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충청도 서산의 한적한 바닷가 한촌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 관음사와 특별한 관련이 있을 개연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서산 부석사 불상이 관음사로 정상적으로 기증됐을 것이라 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고려 말인 1350년경 전후부터 1400년경까지 왜구의 발호가 극심했다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일이다. 특히 1370년 전후가 그 절정기라 할 수 있다. 이 당시 서해안 일대는 물론이고 내륙 깊숙한 남원까지 왜구가 침입해 마을과 사찰을 불태우고, 수많은 양민을 무자비하게 살상하고, 많은 문화재와 양식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했다. 대부분의 고려불화가 일본에 남아 그 아름다움을 뽐내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약탈의 결과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에서 보면 서산 부석사의 문화재도 서해안을 따라 황해도까지 휩쓸던, 그리고 서산을 침략했던 왜구에 의해 1370년경 약탈됐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쓰시마 섬 왜구의 심각한 피해는 고려 말과 조선 세종 때 등 두 차례에 걸친 쓰시마 섬 정벌로 일단락될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서해 바닷가의 한적한 산비탈에 위치한 부석사가 약탈의 좋은 대상이 되었을 것은 무척이나 당연하게 보인다.
넷째, 일본으로 약탈된 문화재 가운데 어느 때 어떤 곳에서 어떤 문화재를 약탈한 후 그 곳을 불 지르고 얼마나 많은 양민 또는 승려를 학살했다는 내용을 해당 문화재나 별도의 기록으로 남기는 예는 전혀 없다. 따라서 이 관음보살상도 약탈해 갔다는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는 원천적으로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상의 인과관계로 보아 통일신라 금동불입상은 일본으로 돌려줘야겠지만 금동관음보살좌상 만큼은 좀 더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약탈품임이 밝혀진다면 국제법상의 해결 이전에 양국 정부의 보장 아래 양쪽 총무원과 한국의 부석사, 쓰시마 섬 관음사 측이 불교적 인과론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본의든 아니든 왜구의 약탈품을 취득하여 600여 년간 봉안하고 있었던 관음사가 원인 제공자이므로 어떤 보상을 주고받든지 간에 원 봉안처인 서산의 부석사로 되돌려주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한국미술사연구소 소장
:: 필자 소개 ::
경북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예술대 미술학부 불교미술 전공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불교미술사학회 회장, 한국미술사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 강탈됐다는 증거없어, 다 돌려주는게 옳다 ▼
정영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석주선기념박물관장
이 두 불상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관음보살좌상은 조성 시기가 있어 고려시대 말기인 충숙왕 17년(1330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 다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어 왔다.
논점은 간명하다. 이 두 불상이 과연 일본이 강탈해 간 증거가 있느냐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필자는 수십 차례 쓰시마 섬에서 관련 사실을 조사해 봤지만 강탈의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기증이나 교환, 선물이었다면 어떡할 것인가.
쓰시마 섬에 전해지는 다이슈진자지(對州神社誌·1685년 편찬)에 따르면 미네(峰) 정 기사카(木坂)의 가이진(海神) 신사에 ‘금상(金像) 2기, 목상(木像) 3기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고 했는데 금상 2기 중 하나가 바로 최근에 도난당해 국내에 들어온 여래입상인 것이다. 또 고려와 조선시대의 금동불상, 고려청자, 조선백자 등 많은 한국 유물이 이 신사의 보물각에 보존돼 있다. 이렇듯 한국의 불교 유물이 많은 것은 가이진 신사가 쓰시마 섬 서북쪽 해안으로 한반도와 가까우며, 이 신사가 세워지기 전에는 이 자리에 사찰이 있어서 교류가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절에는 큼직한 신라 범종도 걸려 있었다는 기록과 증언도 남아 있다. 근년에 이르러 절이 없어지고 그 절터에 신사를 건립했으므로 전해 오던 사찰 유물들이 그대로 전해지게 돼 오늘까지 불상들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약 10년 전에도 누군가 가이진 신사 보물각 철문 자물통을 따고 이 여래입상을 훔쳐 고베 지역으로 유출했으나 곧 발각돼 돌아온 적이 있다. 이번에는 문을 따고 들어가기는 어려웠던지 지붕을 뚫고 들어가 훔쳤다는 것이다.
쓰시마 섬의 원로 학자인 나가도메 히사에(永留久惠·94) 씨에 의하면 이 여래입상은 본래 신사 본전(本殿)에 있었는데 유지들과 논의한 결과 그 자리에 신사 주신체(主神體)를 모시자고 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별도로 보존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우리 삼국시대의 각국 금동불상과 통일신라시대 불상을 본전 주신체로 봉안했던 일본 내 신사는 이미 여러 곳이 알려져 있다.
또 하나의 불상은 도요다마(豊玉) 정 고쓰나(小綱)의 관음사(觀音寺)에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청동관음보살좌상이다. 이 좌상에 관해서는 일본 마이니치신문사에서 1974년 3월 발행한 ‘불교예술(佛敎藝術)’ 특집호에 소상히 발표된 바 있다. 즉 1951년 5월에 당시 관음사의 안도(安藤) 주지스님이 보살좌상의 먼지를 털고 깨끗하게 모시려고 들어 옮길 때 아래쪽 막음 송판이 떨어져 불상 안에 봉납된 물건들을 확인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때 많은 장엄물과 함께 한지에 먹 붓글씨로 쓴 보살상의 조상 시기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충남 서산의 부석사 관음전 주존불로 이 관음보살좌상을 조성하였는데, 이때가 고려 제27대 충숙왕 17년이다. 최근에는 이 절에 스님이 없고 도요다마 정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밤에는 관리자가 없어 훔쳐 내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로 일본 쓰시마 섬에서 도난 당해 국내로 밀반입된 2기의 불상이 이미 수백 년간 쓰시마 섬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 불상들이 일본이 약탈하거나 강탈해 갔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교류나 기증, 선물 등 불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건너갔을 개연성도 있는 것이다.
강탈의 증거가 없는데 훔쳐 온 불상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창피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루속히 국내에 밀반입된 두 불상을 반환하기 바란다.
정영호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석주선기념박물관장
:: 필자 소개 ::
서울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 교수를 거쳐 현재 동 대학 석좌교수 겸 석주선기념박물관장으로 있다. 국사편찬위원, 한국문화사학회 회장, 한국범종연구회 회장,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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