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섭 객원논설위원·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러한 오인(誤認)은 정전협정문 원문에 김일성, 펑더화이(彭德懷), 그리고 마크 W 클라크 3인의 이름만 있을 뿐 한국 대표의 서명은 없다는 사실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정전협정 원문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3인은 각각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그리고 유엔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서명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정전협정문에 당시 교전 중이던 군대의 사령관들만 서명했을 뿐 교전국의 국가수반들이 서명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정전협정이란 교전 중인 쌍방 군대의 수장들이 가까운 미래의 일정 시점(時點)을 정해 전투 혹은 전쟁을 중지할 것을 약속하는 문서이다. 1953년 당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도 작전지휘권을 넘겨받았던 유엔 참전국 군대들과 한국군 모두를 대표해서 서명했던 것이다. 한국은 1950년 7월 14일 ‘작전지휘권 이양서한’을 통해 긴급한 전시 상황임을 감안해 군사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따라서 유엔군사령관의 서명은 한국군의 서명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고, 별도로 한국군 대표가 서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정접협정은 교전 중인 군대의 수장이 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은 것은 중국이나 미국을 대표해서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아이젠하워가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은 것과 같다. 정전협정 규정에 따라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에 한국이 참가했을 때 북한을 포함한 공산진영은 한국의 당사자 자격과 관련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1953년 8월 8일에 가조인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한 확약을 받아냈고,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7월 27일 당일 아침 한국군 대표 최덕신을 경무대(景武臺)로 불러 정전협정문 서명식에 배석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 대표 최덕신은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7월 27일 오후 1시 문산의 유엔군 기지에서 서명할 당시 16개국 참전군 대표들과 함께 임석했다. 이후 한국군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문에 따라 전투행위를 정지했고, 현재까지 60년간 정전협정을 준수해온 엄연한 당사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로서 존재하는 엄연한 사실을 북한 정권이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북-미 간 직접 대화를 통해 북한 정권의 위상을 강화하고, 미국과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주한미군 철수를 끌어내려는 북한의 대남전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라는 사실조차 부정하는 북한 정권이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고 체결하자는 평화협정은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의 속편에 불과한 것이다.
북한 정권이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상대하려는 것은 한반도의 민족사적 정통성이 한국이 아니라 북한에 있다는 북한 정권의 대내외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효과도 있다. 즉, 한국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오랜 선전선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한국과의 엄청난 경제적 격차를 ‘가난한 자주’ 대 ‘외세의존적 번영’이라는 도식으로 북한 주민에게 합리화해온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만일 북한 정권이나 한국 사회 일각의 주장처럼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면 2015년으로 예정된 전시작전권 환수 이후 한반도에는 유엔사 밖에서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지 않아도 되는 약 65만 대군이 존재하게 된다. 전시작전권 환수에 앞서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북한 정권의 주장 그리고 한국 사회 지도층 일각의 잘못된 인식부터 불식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