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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뒷談]외고 30년… 新 권력엘리트 산실로

입력 | 2013-03-30 03:00:00

“신규 판검사 절반 외고출신… 법조계 10년후 외고천하”





“선진국이 되려면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취지로 1984년 대원외국어학교(현재의 대원외국어고)를 세운 이원희 대원학원 명예이사장. 그는 “대원외고 동문 중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의 비중은 3%에 불과하고 그 밖의 다양한 분야에 두루 나가 있다”며 외국어고 권력화에 대한 우려 섞인 시각을 경계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인가를 안 내주시면 댄스홀이라도 만들어야죠. 이미 땅을 파고 건물 올리고 있는데….”

“아니 이 사람아 학교 용지에 댄스홀이 웬 말인가.”

군사정권의 위세가 서슬 퍼렇던 1982년 10월.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반갑지 않은 손님의 방문에 연신 먼 산을 쳐다보며 말을 흐렸다. 책상 위에는 ‘내년 서울개교 外國語高校(외국어고교) 신설’이란 굵직한 제목의 기사가 실린 석간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12·12사태 직후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정권 실세 이 장관을 난처하게 만든 손님은 이원희 대원학원 이사장. 문교부가 외국어고 신설을 약속해 놓고도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자 항의차 이 장관을 방문한 자리였다.

문교부는 1981년부터 비밀리에 외국어고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신군부 경제팀은 경제성장을 통한 민심 안정을 위해 ‘경제 국제화’를 주창했고 이를 위해 외국어 영재를 길러낼 외국어고 설립을 지원했다.

하지만 청와대 교육팀의 생각은 달랐다. 외국어고 설립이 ‘과외 금지’ 조치 등 신군부의 교육평준화 정책에 어긋난다는 판단이었다. 대령 출신 대통령교육수석비서관이 문교부에 전화해 불호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외국어고 인가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문교부 장관과의 면담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이 이사장은 1983년 3월 구본석 서울시교육감을 찾아갔다. “북한은 이미 10년 전부터 도(道)마다 하나씩 외국어고를 만들어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10년을 넘게 배워도 ‘영어 할 줄 안다’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정권 실세들과 교분이 있던 구 교육감이 대안을 내놨다. 외국어고 설립을 인가하되 일종의 전문학교인 ‘각종(各種)학교’로 하자는 것. 각종학교 졸업생은 정규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던 이 이사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최초의 외국어고인 대원외국어학교와 대일외국어학교가 개교했다.

최초의 외국어고가 문을 연 지 30년째다. 평준화 정책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조용히 등장한 외국어고는 한 세대 만에 한국 사회의 최대 ‘학맥(學脈)’으로 떠오르고 있다. 고교 입시가 폐지되고 평준화 정책이 시작된 게 1974년. 철옹성 같았던 ‘인(人)의 장막’을 구축했던 과거 명문고 출신들의 시대가 저물어 가면서 법조 행정 경제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외국어고 출신들이 요직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벌써 외국어고 출신들이 과거 경기고 등 명문고들처럼 ‘학맥 카르텔’을 형성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 강남 거주 고소득층 자녀가 절반에 육박하는 외국어고 출신들의 배경을 들어 ‘부(富)의 대물림’ 현상이 더욱 고착화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반대 주장도 적지 않다. 그물망같이 촘촘한 학맥을 형성했던 과거 명문고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외국어고 출신들의 문화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일부 외국어고 동문들은 수월성 교육에 대한 불편한 시각이 외국어고 출신들의 부상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을 부추기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평준화 해방구’로 급성장한 외국어고 권력

외국어고 이전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명문고는 ‘삼경(三京)’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던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였다. 이들 고교는 ‘K1(경기고)’, ‘K2(경복고)’ 등으로 불리며 서울대 등 명문대 입시 경쟁을 벌였다. 1972학년도 고교별 서울대 합격자 수를 보면 경기고는 333명으로 졸업생의 절반가량을 서울대에 보냈다. 또 서울고는 248명, 경복고는 212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서 명문고들의 위세는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작되자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 틈을 비집고 새로운 명문고로 부상한 것이 외국어고다.

‘각종학교’로 출발한 초기 외국어고가 처음부터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대원외국어고 1회 졸업생 720명 가운데 서울대에 진학한 이는 25명. 50∼70명씩 서울대에 보냈던 당시 ‘강남 8학군’ 고교들에 비하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1기 신입생을 뽑은 선발고사에선 영어 시험만을 봤고 주로 영어에 흥미가 있는 학생들이 입학했기 때문에 학생 간 학력 편차도 컸다. 설립 초기 외국어고는 입학 경쟁도 치열하지 않았다. 외국어고의 대표 격인 대원외국어고는 개교 첫해 720명 정원에 1272명이 지원해 1.7 대 1의 경쟁률에 그쳤다. 2000년대 들어 자율형사립고가 생기기 전인 2000년대 중반까지 7 대 1 안팎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대원외국어고 1회 졸업생인 김모 씨(45)는 “좋은 대학에 가려는 목적보다 단순히 외국어에 미쳐서 입학한 친구들이 많았다”며 “입학시험에서도 영어 실력만을 보니 명문대에 진학해 고시를 보겠다는 아이들보다 대학에서도 외국어를 전공하려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외국어고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1989년까지 25명에 그쳤던 대원외국어고 졸업생의 서울대 진학자 수는 1990년 41명, 1991년 93명, 1992년 142명으로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1996년에는 202명을 서울대에 보내 1970년대 초까지 한 해 300명을 서울대에 보내던 옛 경기고 못지않은 입시 명문으로 올라섰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외국어고가 ‘교사 평가제’와 ‘수준별 수업’ 등 일반 고등학교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월성 교육을 도입하면서 강남 8학군의 우수학생들이 대거 외국어고로 몰렸기 때문이다. 외국어고가 10년 이상 계속됐던 평준화 정책에 ‘해방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부터 외국어고 설립을 확대해 외국어고의 성장에 날개를 달아줬다. 1990년 한영외국어고와 과천외국어고, 1992년에 명덕 이화 청주 중산 경남외국어고가 문을 열었다. 서울 등 대도시에 이어 그때까지 비평준화 지역으로 남아있던 지방 도시들도 하나둘 평준화 체제로 바뀌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지방 명문고들도 서서히 외국어고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내신 반영 비율 상향 조정 등 외국어고들의 독주를 막는 정책이 나오고 최근 자율형사립고들이 생겨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외국어고 출신들은 소위 일류대 입시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3년도 서울대 입시에서 20명 이상의 합격생을 배출한 22개 학교 중 7개 학교가 외국어고다. 특히 대원외국어고는 졸업생의 82.1%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이른바 ‘SKY’대에 보냈다.



“법조계는 10년 내 외국어고 판이 될 것”

과거 명문고들은 입시 명문의 자리를 내줬지만 아직 한국 사회 최대 파워인맥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대는 한 해 5000명이 들어가지만 경기고는 500명밖에 못 들어온다”라고 자랑했을 정도로 전국 최고의 수재들을 싹쓸이했던 만큼 두꺼운 인재풀은 아직 다 소진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교 입시 마지막 세대까지 은퇴가 가까워지면서 경기고의 학맥도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박근혜 정부가 지금까지 임명한 차관 28명 가운데 경기고 출신은 2명. 최근 성추문 의혹과 관련해 자진 사퇴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제외하면 경기고 출신은 김규현 외교부 1차관이 유일하다. 경기고 못지않은 명문고로 명성을 떨치던 경복고는 2명, 서울고 출신은 전무하다. 과거 이들 명문고 출신들이 장차관 직을 석권하던 것과 큰 차이다.

자연스레 세간의 관심은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외국어고 출신들이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새로운 권력층에 올라서느냐에 쏠리고 있다.

과거에 명문고 출신이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서는 사다리 역할을 하던 법조계는 외국어고 동문들의 진출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다. 대원외국어고는 올 들어 법조 100여 년 사상 가장 많은 법조인을 배출해온 경기고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2013년판 한국법조인대관’에 따르면 전체 법조인 2만1717명 중 대원외국어고 출신은 460명으로 경기고 출신과 같았다. 대원외국어고 출신인 조병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입소생과 현재 로스쿨을 다니고 있는 예비 법조인을 합치면 대원외국어고 출신이 500명을 훌쩍 넘어선다”고 말했다.

대원외국어고에 이어 한영외국어고가 225명의 법조인을 배출해 6위에 올랐고 명덕외국어고(158명)와 대일외국어고(136명)는 각각 12, 15위를 차지했다. 개교한 지 30년이 채 안 된 외국어고 4곳이 법조인을 많이 배출한 상위 20개 고등학교에 이름을 올린 것.

사법연수원에서도 외국어고 출신들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5년간 사법연수원 수석졸업자 5명 가운데 4명이 외국어고 출신이다. 이렇다 보니 사법연수원 성적 우수생들이 몰리는 판검사 임용에서 외국어고 출신들의 우세는 더 두드러진다. 현직 판사들의 출신 고교는 대원외국어고(85명) 한영외국어고(43명) 명덕외국어고(39명)가 1∼3위를 차지했으며 경기고(33명)는 4위에 그쳤다. 검사 역시 대원외국어고(44명) 출신이 가장 많았다.

외국어고 출신 법조인의 좌장은 대원외국어고 2회 졸업생인 김윤상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다. 판사로는 대원외국어고 6회 졸업생인 곽윤경 서울중앙지법 판사와 최태영 서울북부지법 판사가 있다. 역사가 짧은 만큼 아직 법조계의 최고위직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머지않아 외국어고 출신들이 주축 세력이 될 것이라는 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검찰 고위 간부는 “신규 임용 판검사의 절반 정도를 외국어고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며 “이대로라면 10년 내에 외국어고 출신들 ‘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고시, 외무고시에서도 외국어고 출신들은 다른 고교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2011년 신임 사무관 297명의 출신 고교를 보면 가장 많은 11명이 대원외국어고 출신이었다. 출신 고교 상위 20위 중 외국어고는 11곳이나 된다. 외무고시 합격자 역시 30∼40%가 외국어고 출신이다.


외국어고 졸업생들은 총동문회뿐 아니라 법조계 경제금융계 등 졸업생이 많이 진출한 분야의 개별 모임을 통해 수시로 친목을 다지고 정보도 교류하고 있다. 대원외국어고 총동문회 송년의 밤에 모인 졸업생들. 대원외국어고 총동문회 제공

▼ “학연 카르텔 병폐 우려” vs “동문간 연대의식 약해” ▼

과거 명문고와 달리 해외 네트워크도 갖춰

경제계에도 외국어고 동문들이 넓게 포진하고 있다. 초창기 외국어고 졸업생들이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만큼 외국어고 동문들은 아직 대기업 임원급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에 진학했던 재벌가 자녀들이 1990년대 들어 외국어고 진학을 선호하면서 외국어고는 30, 40대 젊은 경영인을 다수 배출하고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아들인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 설윤석 대한전선 부회장, 박인원 두산중공업 상무 등이 대원외국어고를 나왔다. 현대중공업 최대 주주인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의 아들인 정기선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은 대일외국어고,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는 이화외국어고, 허윤홍 GS건설 부장은 한영외국어고 출신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현재 20, 30대인 총수 일가의 자녀들은 외국어고에 진학하거나 외국 고등학교로 유학을 가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며 “조기 유학보다는 대학 유학을 염두에 두고 외국어고 진학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말했다.

외국어고는 과거 명문고에 비해 과학, 의료 분야로의 진출이 제한적이다. 경기고 등 과거 명문들이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치권에서도 외국어고 출신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국회의원 중에서는 대일외국어고를 졸업한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이 유일한 외국어고 출신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외국어고 출신 동문이 국회의원 보좌관, 정당 당직자로 정치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국회 보좌관 및 비서관으로 근무하는 외국어고 출신 동문들은 30여 명에 이른다. 한 대원외국어고 출신 보좌관은 “새누리당은 최근 들어 기수별로 1, 2명씩 외국어고 출신들이 당직자로 들어온다”며 “동문별로 모임을 갖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친목을 다지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어에 강점이 있는 동문이 많은 데다 1990년대 말부터 해외유학반을 편성해 미국, 유럽의 명문대학 진학을 지원한 덕분에 넓은 해외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는 것도 외국어고 동문들의 강점이다. 김일형 대원외국어고 교장은 “국제기구와 해외 로펌 등에 진출한 동문이 1400명쯤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계 금융회사나 컨설팅사에서도 서서히 임원급으로 올라서고 있다. 김동빈 HSBC은행의 상무이사는 대원외국어고 1회, 박상순 보스턴컨설팅그룹 파트너는 이 학교 2회 졸업생이다. 이원희 대원학원 명예이사장은 “법조계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외국계 금융회사 등에서도 동문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며 “몇 년 전부터는 동문회를 특급호텔 대형 컨벤션홀에서 열 정도”라고 말했다.



‘학맥 카르텔’ 병폐 재연 우려도

외국어고 출신들은 외국어고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특히 외국어고 출신들은 비슷한 업종에 진출한 동문들끼리 모임을 형성하며 학맥을 다지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모임은 ‘법조인 동문회’와 ‘경제인 동문회’.

두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대원외국어고 법조인 동문회에는 40세 안팎의 법조계 동문 40여 명이 참석한다. 동문 가운데 전문가를 초청해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대원외국어고 출신 중 공직에 진출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행정분과위원회, 경제금융계 출신들이 모이는 경제인 포럼 등도 열린다.

명덕외국어고 역시 현직 판검사와 사법시험 합격자 등 100여 명이 가입해 1년에 두 차례 정기모임을 갖는 법조동문회를 운영하고 있다. 명덕외국어고 총동문회 관계자는 “대부분의 동문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확고히 잡아가는 단계에 있어서 아직은 과도기”라며 “하지만 10, 20년 뒤에는 더 활성화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동문들이 젊고 인터넷에 익숙한 만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모임도 활성화돼 있다. 문귀호 대원외국어고 총동문회 사무총장은 “대원외국어고 동문회 페이스북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5800여 명의 동문이 가입돼 있다”며 “페이스북을 통해 취업 정보와 법, 의료, 경제에 관한 각종 정보를 주고받는 동문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치열한 외국어고 입시 경쟁의 배경에는 앞으로 외국어고 출신들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학부모들의 인식이 깔려 있다. 동아일보와 입시정보업체 ㈜하늘교육이 중학교 3학년 자녀를 외국어고에 보내길 희망하는 전국 학부모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5.7%(197명)가 ‘외국어고 졸업자 간 인맥 영향력이 일반고 출신보다 더 크다’고 답했다. 55%(165명)는 ‘외국어고 출신의 영향력이 경기고 같은 과거 명문고처럼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외국어고 출신들의 학맥 구축을 우려하는 시각도 많다. 외국어고 출신들이 요직을 독차지하기 시작하면 과거 명문고들처럼 견고한 ‘학맥 카르텔’을 형성해 패거리 문화나 서열주의와 같은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기획재정부 국장급 간부는 “중요한 업무일수록 이해관계가 엇갈리거나 타 부처와의 협의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보니 동문 네트워크가 활발한 외국어고 출신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며 “경기고 등 과거 명문고 출신들이 일찍부터 요직을 꿰찬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상당수가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계층적 동질성이 강한 외국어고 출신들이 요직을 독과점하면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명문고에는 ‘가난한 수재’가 적지 않았지만 외국어고 출신의 절반가량은 서울 강남 3구 출신이고 부모는 법조인, 의사, 교수 등 전문직이다. 외국어고 출신들이 새로운 권력층으로 자리를 잡으면 ‘부(富)의 대물림’이 더욱 고착될 것이라는 우려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과거 명문고들과 달리 대부분 남녀공학인 외국어고에서는 동문들끼리 결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울의 한 외국어고를 졸업한 서모 씨(37·여)는 9년 전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난 동문 선배와 결혼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의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이 부부는 최근 초등학교에 입학한 자녀도 외국어고에 보낼 계획이다. 서 씨는 “주변에 동문들끼리 결혼한 경우가 많다”며 “일반 고교에 비해 외국어고 출신들이 누릴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넓다 보니 대부분 자녀를 외국어고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패거리 문화에 대한 반감… 과거 명문고보다 연대의식 약해

외국어고 출신들은 이런 우려에 대해 ‘시기상조’라고 반박한다. 과거 명문고들이 지연(地緣)과 연계되면서 폐쇄적 성향을 띠었던 것과 달리 외국어고 출신들은 지역의식이 약하고 학연보다는 직연(職緣)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외국어고 출신 상당수가 단지 동문이라는 이유로 자기들끼리 뭉치면서 타 고교 출신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패거리 문화’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동문 간, 기수 간 연대의식도 과거 명문고들보다 약한 편이다. 대일외국어고 동문회 관계자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보니 과거 명문고들에 비해 동문회가 잘 운영되지 않는다”며 “상당수 동문이 과거처럼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는’ 동문회 문화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외국어고 출신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며 계층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상류층 자녀들이 외국어고에 진학한 것은 과거 명문고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외국어고 출신 중에도 환경운동, 인권운동에 참여하는 이가 적지 않은 등 관심사나 사회적 계층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조병규 대원외국어고 총동문회 부회장은 “강남 출신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국 단위 학생 모집이 제한되기 전에는 과거 명문고들처럼 지방 학생도 적지 않았다”며 “밖에서 보는 시각에 비해 동문들의 출신 배경이나 계층이 편중돼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외국어고 출신들의 부상을 ‘계층 양극화’와 연결시키는 주장들의 배경에 수월성 교육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꾸준히 불거지고 있는 ‘외국어고 폐지론’처럼 외국어고가 평준화 정책의 균열을 가속시키고 사교육을 조장한다고 보는 시각이 외국어고의 높은 위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원희 대원학원 명예이사장은 “대원외국어고를 설립할 때부터 학생들에게 ‘예전 명문고처럼 기수별 동문회를 만들어 편하게 성공하려는 생각은 버리라’고 했다”며 “대원외국어고 출신만 해도 법조계에 진출한 동문은 전체의 3% 정도에 불과한데 과거의 틀에 끼워 맞춰 비판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외국어고 권력화에 대한 우려에는 ‘남 잘되는 것은 못 본다’는 풍조가 깔려 있는 것 같다”며 “평준화 정책이 폐쇄적인 학연 문화를 해소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인재를 길러내려면 교육의 다양성과 자율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병기·최예나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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