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가구가 엘리베이터 1개를 같이 쓰다 보니 엘리베이터는 한 달에도 1, 2번 고장나기 일쑤다. 겨울에 실내 온도를 아무리 높여도 훈훈한 기운이 잘 돌지 않는다. 그는 “수도배관이 낡아서 터지거나 화장실이 고장 나고, 녹물도 자주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 동네 공인중개사 박모 씨(43)는 “멀쩡한 ‘겉’과 달리 ‘속’이 곪을 대로 곪은 아파트들이 많아 주인과 세입자 간 갈등도 많다”며 “워낙 낡아 개인이 고치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 영광은 사라지고….
정부는 1989년 폭등하는 집값을 안정시키고 수도권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이들 5곳에 1기 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1992년 말 입주를 마친 1기 신도시는 깔끔한 데다 대형공원 등을 갖춰 쾌적한 도시생활을 할 수 있는 수도권 주거지로 각광 받았다. 중대형 아파트 비중이 높은 1기 신도시는 2000년대 주택시장 활황기에 최대 수혜자가 됐다. 2007년에는 아파트 가격이 강남 못지않게 치솟았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침체기가 시작됐고, 실수요자 위주로 시장이 재편됐다. 중대형 아파트 가격이 급락하면서 1기 신도시의 위상마저 추락했다. 파주, 판교에 조성된 2기 신도시도 1기 신도시의 가격 하락을 부추겼다. 판교, 광교, 고양 식사·덕이 지구, 파주 운정신도시 등에서 쏟아진 신규 물량 공세를 버티지 못했다. 박정욱 부동산 써브 연구원은 “2기 신도시 때문에 경쟁력이 갈수록 약화되는 상황”이라며 “싼값으로 새 아파트를 얻을 수 있다 보니 수요자들이 2기 신도시로 눈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현재 1기 신도시 아파트 1채의 평균 가격은 4억 원 밑으로 떨어졌다. 2006년 수준으로,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써브가 1기 신도시 아파트 27만7019채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2007년 4억 원을 돌파한 이후 2008년 4억8980만 원까지 치솟고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4억 원 선은 유지했지만 이젠 버틸 힘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상승 동력도 없다는 점이다. 1기 신도시의 핵심 주거층이 베이비부머라 가격이 뛸 가능성은 크지 않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 전문위원은 “주요 주거 층인 베이비부머가 은퇴를 시작하며 집을 줄여가려고 하는 움직임도 하락세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재건축 사업을 진행하기도 어렵다. 아파트를 준공한 지 20년밖에 지나지 않아 재건축 연한이 되려면 아직 10년 이상 남았다. 도시정비법 개정으로 재건축 연한이 도래하지 않아도 주민 10분의 1의 동의를 얻으면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재건축 안전진단을 요청해 재건축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기능·구조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경우로 한정돼 있다.이에 따라 일부 주민들은 아파트 리모델링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형욱 1기 신도시 리모델링 연합회장은 “재건축을 하면 살던 사람이 떠나지만 리모델링은 다시 돌아오는 사업인 만큼 수직증축을 허용해 주고, 용적률 제한도 완화하는 등 리모델링을 장려하는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태섭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리모델링 규제를 과감하게 줄여야 1기 신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도시에 대량으로 공급한 아파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정부의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낡은 중대형 아파트를 소규모 세대로 분리해서 분양, 임대하는 세대분리형 리모델링을 하자는 제안도 있다. 박 위원은 “중대형을 소형 아파트 2개로 쪼개는 방식으로 리모델링이 되면 1기신도시의 주요 주거층인 베이비 부머도 은퇴 후 현금소득을 얻을 수 있고, 신도시 자체도 활기를 되찾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