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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만난 사람/홍찬식]소설가 이문열 씨

입력 | 2013-04-01 03:00:00

“새 정부 문화정책엔 국가체제 수호 개념이 필요하다”



서울에는 한 달에 한두 번만 간다는 이문열 씨는 지난해 대선 때 50, 60대의 표심에 대해 “민주화 세력이 정의와 시대정신을 독점하고 있는 것에 큰 분노를 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를 다룬 새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 새 정부는 3대 국정 목표 중 하나로 ‘문화 융성’을 내세우고 있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꽃샘추위가 계속되던 지난주 경기 이천시에 있는 소설가 이문열 씨의 자택을 찾았다. 보수 진영의 대표적 문인으로 꼽히는 그에게 ‘문화 융성’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서였다.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그의 집 마당에는 햇빛이 가득했고, 날씨는 한결 풀려 있었다. “이제 봄이 온 것이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이대로 봄이 될 것 같다”고 답했다. 말만으로도 봄을 맞은 듯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처럼 취임사에서 문화를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 정책 방향도 구체적이다. 국민 모두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리게 하고, 문화를 통해 세대와 계층 갈등을 해소하며, 문화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정부 예산 가운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집행하는 비율, 즉 문화재정 비율을 2017년까지 2%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문화재정 비율은 1.39%다.

―정부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문화 분야를 육성하겠다는 것은 문화계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고 우리 사회의 발전 단계에서도 필요한 것 같다. 그렇지만 어떤 내용의 문화를 융성시키느냐도 중요할 것 같은데….

“문화가 우리 사회나 국가 체제를 수호하는 진지(陣地)로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됐다. 문화 진지라고 하면 문화예술 학문 종교 대학 같은 것이 될 텐데,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보위하는 진지들은 그동안 많이 함락되고 초토화됐다. 체제 방어라는 말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결코 나쁜 말이 아니다. 어느 체제든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 새 정부는 이 점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문화 융성’에는 국가 체제의 수호, 유지, 방어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이 포함되어야 한다.”

―문학 쪽 사정은 어떤가.

“지난해 대선 때 문인들은 네 차례에 걸쳐 집단적 의사 표시를 했다. 첫 번째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문인 멘토단을 결성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단일화를 요구한 것이었다. 단일화라는 말이 객관적인 주문 같지만 실상은 문재인 안철수 중 한 사람만 나가 선거에서 이기라는 얘기였다. 세 번째는 문재인 후보로 단일화되었을 때 문 후보를 국민 후보로 추대했던 일이었고, 마지막은 문인 137명이 투표일 직전에 ‘우리는 정권 교체를 원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신문 광고를 낸 것이었다. 보수 우파 쪽은 없었고 전부 진보 좌파 쪽이었다. 드러난 것으로만 보면 문단에는 보수 우파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대선 때 시인 김지하 씨는 우파 쪽에 서서 활동했다.

“잘 봐주면 1 대 9, 아니면 0 대 10으로 문인 사회는 진보 일색이다. 선거 결과를 보면 일반 국민은 보수 진보가 절반씩을 차지했다. 반면 문단은 한쪽으로 완전히 쏠려 있다. 1 대 9, 0 대 10은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다. 문화계에서도 현실적인 비율로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보수 성향의 문인도 없진 않을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우파 쪽 문인으로 생각되어 지지를 부탁하면 ‘선거 때 표는 찍겠는데 서명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더구나 신문에 자기 이름이 보수 쪽 지지자로 나가는 것에는 펄쩍 뛰며 반대한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문화 진지의 함락과 관련이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문화 진지를 좌파 쪽이 장악하면서 문화예술계에서 보수 꼴통으로 찍히는 것은 거의 죽음을 뜻하게 됐다. 우파 쪽이라도 이런 분위기를 거슬러 가며 성명 같은 것을 낼 수 있겠는가. 이제는 거의 억압의 형태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명박 정권 때 좌파 쪽은 언론 자유가 후퇴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언론 자유가 후퇴한 것은 맞다. 하지만 좌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정부의 통제 탓이 아니라 일부 단체 때문이다. 한국 작가들은 자기 검열이 대단히 심하다. 어떤 내용을 표현하고 싶어도 혹시 찍힐까 몰라 스스로 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문화 진지의 함락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의 ‘문화 권력’이 좌파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정부 탄압을 받으며 공들여온 결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들이 30년간 작업한 끝에 지금의 문화계 판도를 만들어 놓은 건 맞다. 그들의 문화라는 것이 민주화운동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민주화를 위해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모든 가치 기준은 이념성이다. 그런 잣대로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한류마저 베어 버리고 처벌해야 할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념성이 기준이 되는 문화는 불행하다. 그렇게 해서는 문화가 발전할 수도 없다.”

―이명박 정권은 나름대로 나서지 않았던가.

“함락된 진지를 탈환해 보겠다고 사령관과 참모를 (진지 안으로) 떨어뜨리긴 했다. 그런데 무사히 앉아 있는 친구들은 없고 사령관들이 오히려 쫓겨 나오더라.”

―박근혜 대통령이 현대사 인식과 관련해 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았는데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박정희 정권이 18년이나 계속됐다면 어떤 필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데도 박정희라는 사람이 나와 가지고 총을 휘둘렀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5공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을 가져 본다. 만약 파리 런던 워싱턴에서 군 수사부대 사령관 하나가 절묘한 틈을 타 각료들을 연금했을 때 거기에서 5공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인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나왔다. 그것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내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런 설명의 일부를 해본 것이다. 새 작품에서 고심해 보려고 한다.”

―박 대통령에게 바라고 싶은 게 있다면….

“국가의 3대 요소로는 국민, 헌법, 영토를 꼽는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영토뿐이다. 헌법도 많이 바뀐 것 같고 법도 애매하다.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민이 없다는 것이다. 나라가 있다면 국민도 있어야 하는데 국민이 없다. 교육 현장에서는 국민이 아닌 자유 시민이 길러지고 있고 심한 경우 북한 국민이 길러지고 있다. 어차피 당분간은 국가를 통해 세계화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 새 정부가 국민 형성에 대한 인식을 갖는 일이 필요하다.”

―지난 대선 때 5060세대가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세대로서 그들의 선택을 어떻게 보고 있나.

“50, 60대 대부분은 젊었을 때 국가에서 군대 가라면 가고, 죽으라고 하면 죽을 각오까지 했다. 세금 내라고 하면 세금 내고 줄 똑바로 서라고 하면 줄을 섰다. 그렇게 조국이라고 마음에 새겼던 나라에 대해 공영방송에서는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 ‘대한민국은 나라도 아니다’라고 나무랐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정의를 독점하고 시대정신의 표상이 됐다.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은 전체 세대의 10%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나머지 90%는 나라도 아닌 나라를 위해 충성한 꼴이 되고 말았다. 민주화는 그들만의 공이 아니라 90%의 같은 또래들이 말없이 따라와 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소수의 용감한 사람만 의인이 되고 나머지는 하찮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 것에 분노를 드러낸 것이다.”

새 정부 들어 이 씨가 바라는 문화예술계의 이념적 균형이 이뤄질 것인가. 그는 곧바로 봄이 올 것처럼 얘기했지만 여전히 쌀쌀한 바깥 날씨처럼 전망은 몹시 불투명해 보인다.

▼ “이제부턴 쓰고 싶은 소설 쓸 것… 신작으로 ‘예술가 소설’ 구상중” ▼


이문열 씨는 문화계의 좌파 쏠림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 정치 참여에는 선을 그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급하다. 앞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10년이 채 남지 않았다. 70세 이후에는 젊은 시절 같은 왕성한 활동력이 나올 수 없다. 과거 내가 쓰고 싶었거나 취재해놓은 것을 모두 소설로 옮기려면 지금의 내 생산력으로는 20년 이상이 필요하다. 다 쓸 수가 없는 형편이다. 지난해부터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이 씨는 1948년 생으로 올해 65세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외출하는 것을 빼고는 이천 자택을 지키며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달 그는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다. 미국 고교생들이 영어로 번역된 그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나서 이 씨와 토론했다. 한국 문화와 정치에 대한 열띤 이야기들이 오갔다고 한다.

이 씨는 신작으로 1980년대 좌우 갈등과 사회 대립 문제를 다룬 ‘예술가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이제는 잘 팔리는 소설이 아닌,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쓰고 싶다. 자전적 소설을 쓰게 되면 자연스레 ‘예술가 소설’이 될 것이다. 1980년대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 나타나는 과장되고 왜곡된 것의 뿌리가 그 당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이므로 객관화해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최근 우리 문학의 세계화와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소설가 신경숙 씨가 미국에서 ‘엄마를 부탁해’로 인기를 모은 것은 대단한 발전이다. 우리 문학의 해외 진출에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노벨 문학상은 문학을 잘했다고 주는 상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인류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따져 주는 상이다. 노벨 문학상을 세계 문학의 척도로 보는 시각에는 반대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 작가들의 노벨 문학상 수상도 머지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