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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원샷원킬… 일당백… 독하게 살아남았다”

입력 | 2013-04-02 03:00:00

동부대우전자 연구소장 3인방… 세번의 매각실패 끝에 부르는 희망가




1998년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 아침, 위대성 동부대우전자(옛 대우일렉트로닉스) 냉기연구소장(49·당시 대우전자 냉장고연구소 김치냉장고 팀장)은 넥타이 대신 붉은 띠를 머리에 맸다. ‘빅딜 반대.’ 붉은 띠에 적힌 문구였다.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출신인 그는 대학 때도 안 해 본 데모를 서른넷에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착잡하기는 김경학 세탁기연구소장(52·당시 세탁기연구팀 근무)이나 양경회 주방기기연구소장(53·당시 주방기기개발부 근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포함한 대우전자의 거의 모든 직원들은 이른바 ‘대우 사태’ 이후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 간 빅딜(대규모 사업 교환)을 막기 위해 반 년 가까이 서울 본사와 경북 구미, 광주를 오가며 시위를 벌였다.

위 소장은 “엔지니어로서의 마지막 오기였던 것 같다. 1990년대 ‘가전 명가’로 불리던 우리가 경쟁사인 삼성으로 팔려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빅딜은 실패했다. 대우일렉은 1999년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와 함께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그 뒤 14년, 대우전자 사람들은 세 차례의 구조조정과 매각 실패를 겪었다. 사명은 대우일렉트로닉스로 바뀌었고 사업부는 세탁기, 냉장고, 주방기기만 남았다. 그 사이 1만2000명이던 국내 직원은 1450명으로 줄었다.

‘이제 정말 끝인가’ 싶던 올해 1월, 마침내 동부그룹이 대우일렉을 인수했다. 대우일렉은 1일부로 동부대우전자가 됐다. 이제까지 묵묵히 연구소를 지켜 온 대우전자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명 변경을 이틀 앞둔 지난달 29일 부평연구소를 찾아 연구소의 세 소장을 만났다.

○ 한 우물만 파는 ‘바보 특공대’

양 소장은 1984년, 위 소장과 김 소장은 각각 1987년과 1989년 대우전자에 입사해 동부대우전자가 겪은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두 눈으로 지켜봤다. 가장 궁금했던 점부터 물어봤다. “왜 여태 (회사를) 안 옮기셨어요?”

김 소장은 “바보 같아서”라고 했다. 세탁기 연구팀은 1999년 140명이던 인원이 2009년 15명으로 줄었다. 구조조정에 떠밀려 나간 사례도 있지만 제 발로 걸어 나간 사람도 많다. 사실 세 사람도 그동안 경쟁사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김 소장은 “언젠가는 회사가 다시 살아날 거라 믿으면서 연구에만 올인(다걸기)한 사람들만 남았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셋도 마찬가지예요. 미련하게 자신의 일밖에 모르는 바보들이죠.” 한때 삼성전자, LG전자와 함께 ‘가전 3사’로 불리며 국내외 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했던 과거의 영광도 이들을 붙잡았다. 떠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우전자 시절 이들이 기여한 히트작도 많다. 냉기가 뒷면과 양 측면에서 나오는 ‘입체 냉장고’, 공기방울을 이용해 세척력을 높인 ‘공기방울 세탁기’, 초보 주부들을 위해 요리법을 알려주는 ‘말하는 오븐’이 이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 “헝그리 정신으로 승부하겠다”

현실은 냉혹했다. 해가 갈수록 인력은 점점 줄었고, 채권단은 투자를 늘려줄 수 없다고 했다. 연구개발(R&D) 예산은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다.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기업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한 번의 연구로 반드시 성과를 내는 ‘원샷, 원킬’을 달성하기 위해 밤샘 합숙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부러 강조하지 않아도 ‘헝그리 정신’으로 똘똘 뭉쳤다.

김 소장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이 시작된 직후인 2000년 초 동료 과장 20명과 함께 용인연수원에서 합숙하며 세탁기 혁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6개월간 고생한 끝에 46단계이던 세탁기 제조공정을 26단계로 줄여 원가를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무세제 세탁기’, ‘세제 자동 투입 세탁기’가 이때 나온 제품이다.

양 소장은 “지난 14년간 회사 사정은 바닥을 쳤지만 그래도 우리 기술력이 경쟁사에 밀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다들 ‘일당백(一當百)’을 외치며 독하게 살다 보니 연구 성과는 잘나가던 때 못지않았다”고 말했다.

세 사람이 이끄는 연구소는 2009년 이후 매년 꾸준히 신제품 라인업을 내놓았다. 위 소장은 김치냉장고가 내장된 대용량 3도어 냉장고 ‘클라쎄 큐브’, 김 소장은 세계 최초의 벽걸이형 드럼세탁기, 양 소장은 10분 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스스로 대기전력 ‘제로’ 상태가 되는 전자레인지를 지난해 선보였다. 세 제품 모두 화려하진 않지만 소비자 행동 패턴을 철저히 분석해 혁신을 이룬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변 사람들조차 ‘아직 대우전자가 있어?’라고 묻곤 해요. 그동안 세상에 잘 알리지 못했을 뿐 우리는 꾸준히 연구해 왔거든요. 이제 날개를 달았으니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제대로 승부해 보고 싶습니다.”(위 소장)

부평=김지현·김용석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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