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해 논설위원
노 대통령은 3년 뒤 강철규 후임에 다시 교수 출신을 썼다. 경쟁법학회 회장을 지낸 권오승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 사위인 곽상언 변호사의 서울대 법대 대학원 지도교수로 딸 정연 씨의 결혼식 주례였다. 권오승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고학생 곽상언을 한의원장에게 소개하고 장학금을 주도록 한 은사였다. 관가에선 사위에 대한 보은(報恩)인사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명박(MB) 정부 조각(組閣) 때도 공정위 출신인 김병일이 후보로 추천됐다. 하지만 MB는 “공정거래위원장은 추천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생각해놓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출신으로 대선 때 MB캠프에서 일한 백용호 이화여대 교수였다. MB는 3년 임기를 지키지 않고 1년 3개월 만에 백용호를 빼내 국세청장으로 보냈다. 갑작스러운 돌려 막기 인사로 공정위는 한 달 남짓 위원장 없이 서동원 부위원장 체제로 꾸려 나갔다.
역대 대통령들은 왜 공정거래위원장에 자기 사람을 고집했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미래연구원 출신 한만수 이화여대 교수 카드를 꺼낸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공정위는 ‘경제검찰’로 불리는 권력기관이다. 전속고발권을 독점하고 있어 재벌들은 검찰 못지않게 공정위를 두려워한다. 김대중 정부가 재벌개혁을 할 당시 전윤철 위원장이 휘두른 서슬 퍼런 칼은 재벌들에 오랫동안 각인됐다. 명실상부한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DJ 정부 말기 이남기 위원장 때 ‘클린마켓프로젝트’란 명분으로 비판신문 옥죄기에 권력을 남용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재벌개혁 당시 우군(友軍)이던 언론은 이후 공정위에 등을 돌렸다. 공정거래위원장은 그만큼 칼을 잘 써야 하는 자리다. 어떨 때 칼을 빼고 언제 칼집에 넣을지는 교수 출신보다 공정위 출신이 훨씬 더 잘 안다.
정권 때마다 위원장 후보에 오른 김병일은 1972년 4월 연세대 경제학과 4학년 때 최연소로 행시(11회)에 합격한 수재였다. 공정위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고 2002년 3월 부위원장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가 51세. 관직에서 조진조퇴(早進早退)한 그는 그때부터 김앤장에 몸담았다. 공정위 전관예우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DJ 정부가 호남편중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공정거래위원장을 했을 정통관료다. 그는 최근 사석에서 “부위원장에서 물러나자 여러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며 “내가 김앤장에 간 뒤 많은 후배들이 로펌으로 직행했다. 공정거래위원장에 공정위 출신이 없는 데 대해 책임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김병일 이후 많은 공정위 간부들이 로펌에 똬리를 틀었다. 박 대통령이 위원장감 고르기가 쉽지 않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들이 공정거래위원장 자리를 보은(報恩)인사, 코드인사로 활용하지만 않았더라도 공정위 출신들이 로펌에 대거 포진한 지금의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공정거래위원장 인사, 그동안 참 불공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