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궈룽을 한국에 알렸던 ‘영웅본색’에서 주인공은 저우룬파(周潤發)였다.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으며 쌍권총을 쏘던 그는 남학생들의 우상이었다. ‘영웅본색2’에서 장궈룽이 전화박스에서 죽어가던 장면보다 ‘영웅본색1’의 저우룬파가 수십 발의 총을 맞는 장면이 더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천녀유혼’은 왕쭈셴(王祖賢)의 영화다. 도무지 동양인 같지 않은 큰 키와 긴 머리가 매혹적인 배우. 이 영화의 명장면은 왕쭈셴이 요괴를 피해 물속에 잠수한 장궈룽에게 산소 공급 키스를 하는 장면. “아! 나도 저 물속에 있었으면.”
예술적 성취라는 면에서는 량차오웨이(梁朝偉)가 먼저 떠오른다. ‘화양연화’ ‘적벽대전’ ‘색, 계’ 등에서 그가 보여준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양립 불가능한 연기는 단연 돋보였다.
장궈룽이 내 눈에 들어온 작품은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패왕별희’. 이 영화에서 장궈룽은 경극에서 여자 역할을 하는 배역을 맡았다. 여성스러운 그의 실제 모습과 닮아 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를 오가는 역할을 절묘하게 소화해 냈다.
류더화, 저우룬파, 청룽(成龍) 등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배우가 많았던 홍콩에서 장뤄룽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는 유약해 보이지만 풍부한 감수성으로 마초 배우들이 채울 수 없는 역할들을 메웠다.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아비정전’은 그가 아니었으면 영상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으로의 반환에 즈음한 불안이 팽배했던 홍콩. 이런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장궈룽만 한 배우가 또 있었을까. 인생의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듯 매 순간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빛은 홍콩을 대변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