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1980∼)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기운이 없고 축축한-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옮겼다. 질끈, 눈이 감긴다. 가슴 저 깊은 바닥에 한 마리 뱀이 스윽 지나가는 것 같다. 겁먹고 슬픈 눈으로 흘깃 돌아보면서. 대저 시인이라면 살면서 한 번은 고통의 ‘뻘’을 지나왔겠지만, 이리도 시리고 아린 시라니, 박연준은 대체 얼마나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삶을 뼈저리게 겪은 걸까.
아무 능력 없는 어린 딸 혼자서 아버지의 깊은 병환을 견뎌야 한다. 무능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나 ‘뱀이 된’, 그러니까 괴물이 돼 버린 아버지. ‘차라리, 저 아버지 없이 나 혼자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활활 털어버릴 수 있었으면!’, 절규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질긴 인연. 버릴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너무도 험하고 높은 고개를 필사적으로 안간힘 쓰고 넘으면서, 넘어가야 하면서, 화자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기도할 수밖에 없다.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눈물, 아버지, 생의 난국.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