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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K-패션, 자신감을 보았다

입력 | 2013-04-04 03:00:00

A style이 뽑은 서울패션위크 it 아이템




명장의 아틀리에를 테마로 무대를 꾸민 ‘미스지컬렉션’ 쇼. 디자이너들이 늘 사용하는 침봉에서 모티브를 딴 목걸이와 클러치 등이 쇼의 주제 의식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으로 사용됐다. 서울패션위크 제공

지난달 25∼30일, 국내 패션계의 눈은 서울 여의도와 한남동에 집중됐다. 2013 가을·겨울 시즌을 겨냥한 ‘서울패션위크’가 여의도 IFC서울과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서울시 지원을 받은 IFC서울쇼와 지난해 출범한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가 주관하는 이른바 ‘서울컬렉션 오프(OFF)쇼’로 이원화됐다.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봉 디자이너는 컬렉션을 앞두고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한정된 서울시 지원 혜택을 신진 디자이너들이 더 많이 받게 하기 위해 쇼를 이원화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보고 싶은 쇼의 시간대가 두 장소에서 겹치는 바람에 하나를 포기해야 할 때, 적잖게 속이 쓰렸다.

매년 바람 잘 날 없어 보이는 서울패션위크지만, 패션쇼를 준비하는 디자이너들의 손끝은 세계 주요 패션쇼의 그것 못지않게 여물었다. 캣워크를 누비는 모델들의 어깨, 몸, 무릎 끝에선 올 가을·겨울을 재촉하는 최신 트렌드가 주렁주렁 열렸다.

서울패션위크의 큰 수확 중 하나는 국내 디자이너들의 자신감이 좀 더 커졌다는 사실일 듯했다. 이들은 해외 오트쿠튀르 쇼에서나 볼 수 있던 과감한 실루엣과 동시대 트렌드에 뒤지지 않는 소재 선정 등으로 점점 진화하는 ‘K-패션(한국 패션)’을 보여줬다.

A style 취재팀은 유독 자신감과 자부심이 커 보였던 9개의 쇼를 통해 한국 패션의 현 주소를 들여다봤다.

■ A style 취재 기자들이 ‘Editor′s Pick’으로 꼽은 각 쇼의 대표 룩.

‘쟈뎅 드 슈에뜨’의 보라색 테일러드 코트. 서울패션위크 제공

○ 쟈뎅 드 슈에뜨


지난달 29일 금요일.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장식한 디자이너 김재현의 ‘쟈뎅 드 슈에뜨’는 스케일이 남달랐다. 국내 톱 모델이 총출동했고, 얼굴이 잘 알려진 스타일리스트, 사진작가들이 모두 그녀의 컬렉션을 보러 몰려들었다. 김재현은 재즈 뮤직 ‘베이비, 이츠 콜드 아웃사이드(Baby, It’s Cold Outside)’ 노랫말에서 이번 컬렉션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 노래는 밖이 춥다며 함께 있자고 유혹하는 남자와, 그 제안을 받아들일 듯 말 듯한 여자의 대화로 이뤄졌다.

막 연애를 시작하는 여자의 설렘을 담은 듯한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여성 모델들은 남자친구 것을 빌려 입은 듯한 헐렁한 코트에 여성스러운 시폰 드레스 등 상반된 이미지를 어울리게 연출했다. 멜빵에 달린 리본 장식, 털모자, 고혹적인 버건디 입술, 벨트 장식의 부츠 등은 고급스러운 ‘그런지 룩’(낡은 듯 편안하면서 자유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잘 재단된 보라색 테일러드 코트(①). 그리고 풍성한 가짜 양털 풀오버와 잔잔한 꽃무늬가 빛나는 스커트.


파워풀한 여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미스지컬렉션’. 서울패션위크 제공

○ 미스지컬렉션


지춘희 디자이너는 ‘여성의 옷은 여성스러울 때 가장 아름답다’는 패션 철학을 당장 입을 수 있는 옷 속에 녹이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이번 컬렉션의 주제는 ‘아틀리에 앤티크’. 급변하는 패션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패션의 본질에 충실한 명장의 작업실로 돌아갔다는 설명이다. 캣워크 가운데에 세워진 마네킹과 디자이너들이 즐겨 쓰는 줄자와 침봉을 직접적인 디자인 모티브로 사용한 의상들이 이런 주제 의식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특히 디자이너들이 핀으로 옷의 라인을 잡을 때 사용하는 침봉은 목걸이, 클러치 등 새로운 액세서리로 재탄생해 눈길을 끌었다. 블랙 그레이 핑크베이지 등 기본적인 색상에 골드 등 미래적인 느낌의 포인트 컬러를 과감하게 매치한 감각도 눈에 띄었다.

슈트 하나에도 ‘지춘희표 여성스러움’이 물씬 담겼다. 어깨를 각지게 살린 재킷과 통이 넓은 팬츠를 조합한 블랙 슈트(②).

팔 부분에 반짝반짝한 광택이 나 시선을 끄는 재킷과 펜슬스커트를 선보인 ‘맥앤로건’. 서울패션위크 제공

○ 맥앤로건


강나영, 강민조 디자이너가 함께 선보이는 맥앤로건은 최근 한국판 컨템퍼러리 브랜드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명성에 걸맞게 패션쇼 무대 역시 창의적이고, 현대적이며, 동시에 완성도가 높았다. 1928년, 세계 최초의 여성 파일럿이 된 어밀리어 메리 에어하트에게서 영감 받은 ‘철의 여인’이 테마로, 자신감 있고 진취적인 분위기의 의상들이 착착 무대 위에 등장했다.

뮤즈에 맞게 에이비에이터 재킷으로 시작된 쇼는 어딘가 모르게 섹시함이 깃든 밀리터리룩이 주를 이뤘다. 화룡점정은 마지막 의상으로 등장한 크리스털 장식의 보디슈트와 케이프. 두 디자이너는 원더우먼이 환생한 듯한 파워우먼의 이미지를 통해 컨템퍼러리 패션과 오트쿠튀르 정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작심하고 보여주려는 듯했다.

하나만 고르기가 정말 쉽지 않다. 부드러운 질감의 A라인 스커트에 팔 부분에만 광택이 나게 디자인한 재킷을 곁들인 룩(③), 팔 부분에 크로커다일 장식이 된 차이나칼라의 밀리터리풍 코트를 어렵사리 두 개의 ‘잇(it) 아이템’으로 선정.

계한희 디자이너가 선보인 ‘카이’ 컬렉션. 그라피티, 디지털 프린트 등을 디자인 모티브로 활용했다(위). 손목에 끼울 수 있는 클러치형 가방도 쇼핑 리스트에 넣고 싶었다. 서울패션위크 제공

○ 카이


한 케이블TV의 신인 디자이너 발굴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출신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원하는 5명의 ‘컨셉 코리아’ 참여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힌 계한희 씨는 최근 눈부시게 부상하는 신인 디자이너다. 독립 브랜드를 운영한 지 5년 미만인 신인 디자이너들이 꾸미는 ‘제너레이션 넥스트’ 무대에 선 그는 신세대답게 요즘 20대 젊은이들의 고민을 컬렉션을 통해 풀어냈다.

주제 의식은 청년 실업과 홈리스. 그라피티 패턴을 상하의에 대담하게 풀어낸 오버사이즈룩, 실제 사진을 디지털 프린트 방식으로 표현한 기법 등이 눈길을 끌었다. 오버사이즈 바이커 재킷은 이제 계 씨가 이끄는 ‘카이’ 컬렉션의 핵심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듯. 계한희 디자이너의 ‘절친’이라는 ‘빅뱅’의 지드래곤, ‘2NE1’의 씨엘이 나란히 패션쇼장의 맨 앞줄을 차지하고 앉은 모습도 반항적인 스트리트룩을 지향한 전체 컬렉션의 기조와 썩 잘 어울렸다.

그라피티룩과 매치한 클러치형 가방(④). 클러치처럼 손목에 끼는 형태로 움켜잡을 수 있는 디자인으로, 실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느낌.

곽현주 디자이너의 군복 카무플라주 코트.

○ 곽현주


금발 단발머리를 한 모델이 앞치마에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첫 번째 모델의 쟁반은 향후 이어질 프린트 향연의 예고편이었다. 네온 컬러에 쟁반과 포크, 나이프 모양이 빽빽이 들어선 프린트를 보니 디즈니 만화 영화 ‘미녀와 야수’ 중 주방의 식기들이 공연을 펼치는 ‘비 마이 게스트(Be My Guest)’가 떠올랐다. 뒤로 갈수록 패턴의 실험은 계속됐다. 다양한 색상과 크고 작은 무늬로 잔상 효과를 주기도 했고, 왜곡된 평면에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 입체감을 주기도 했다.

군복의 카무플라주 무늬가 칼라와 허리띠를 장식한 청록빛 코트(⑤).

이상봉 디자이너의 문창살 격자무늬 스웨터.

○ 이상봉


이상봉 디자이너의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은 한옥의 창틀에서 영감을 받은 고유의 독창적인 문창살 프린트가 돋보였다. 문창살 무늬가 고전적인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1960년대 레트로 이미지로 재해석된 것. 격자무늬의 스웨터와 블랙&화이트로 표현된 격자무늬 바지, 건축적인 재킷이 눈에 띄었다. 컬렉션의 마지막 부문에서는 독특한 퍼포먼스가 시선을 잡았다.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모자를 쓰고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이 나타난 것. 특히 피날레에서는 빛이 창호지를 뚫고 밖으로 새어나오는 듯한 창문을 형상화한 드레스를 선보여 해외 바이어들의 주목을 받았다.

핫핑크, 레드, 블루, 블랙, 화이트 색상이 문창살의 격자무늬처럼 얼기설기 엮인 스웨터와 ‘운도남녀(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는 도시남녀)’를 자극하는 스니커즈(⑥).

송자인 디자이너가 선보인 레이스 소매 원피스.

○ 제인 송


디자이너 송자인의 2013 가을·겨울 컬렉션은 가을을 절로 재촉하게 했다. 매니시함과 여성스러움 사이를 오가며 ‘밀당(밀고 당기기)’하는 듯한 컬렉션은 한국 여성들의 마음을 잘 아는 송자인의 특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이스는 과하지 않은 여성스러움으로, 패딩은 오버사이즈지만 적당한 캐주얼함으로 풀어냈다. 쇼 중반부터는 여우의 얼굴이 전면으로 프린트된 셔츠와 스포티한 소재의 롱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일자의 보라색 롱 드레스는 캐주얼하면서도 여성스럽고, 동시에 라인 때문에 중성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블랙과 보라색 계열의 레이스. 레이스를 활용한 소매가 독특한 원피스(⑦)와 푸른색 레이스 재킷(레이스인데 실루엣은 캐주얼하다)을 쇼핑 리스트에 담아뒀다.

김홍범 디자이너의 점프슈트 스타일의 롱드레스.

○ 크레스에딤


역시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출신에 ‘콘셉트 코리아’ 디자이너 5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김홍범 디자이너는 최근 주목받는 신인 중 한 명이다. 그의 브랜드 ‘크레스에딤’ 패션쇼는 이른 시간(오전 10시)에 열렸음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두 번째 자연’이라는 패션쇼 주제답게 다소 난해한 의상들이 나타났다. 활동성 강한 검은색 재킷과 발까지 내려오는 긴 주름치마, 앞뒤 길이가 다른 상의 등 부조화의 조화가 의상 곳곳에서 느껴졌다. 또 기하학적 모양 무늬나 소품을 사용한 것이 돋보였다. 전체적으로 무채색 계통이었던 의상과 달리 광택 있는 소재와 소품으로 포인트를 뒀다.

에너지 넘치는 여성을 연상케하는 점프슈트 같은 느낌의 롱드레스(⑧).

‘조니 헤이츠 재즈’의 캐시미어 소재 회색 조끼와 치마. 서울패션위크 제공

○ 조니 헤이츠 재즈


최지형 디자이너의 브랜드 ‘조니 헤이츠 재즈’ 패션쇼는 일단 톱 모델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혜박, 한혜진, 강승현 등 세계에서 인정받는 우리나라 여성 모델들이 동시에 런웨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컬렉션은 회색을 주제로, 흰색과 검은색을 접목한 무채색 계통이 주요 테마를 이뤘다. 캐시미어 소재의 회색 스커트 코트, 미니 원피스와 흰색 셔츠 등이 조화를 이루며 등장했다. 캐시미어 소재에서 느껴지는 포근함과 세련된 디자인 덕분인지 밝은 색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도 전체적인 컬렉션이 ‘컬러풀’하게 느껴졌다. 흔히 일부 디자이너들이 튀려다 실수하는 치기 어린 디자인이나 과감한 색 조합 대신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옷들에 주목했다. 최지형은 이를 “차갑지만 우아한 ‘도시 사냥꾼’의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흰색 셔츠에 덧입은 회색 캐시미어 소재의 조끼. 그리고 조끼보다 더 진한 회색 캐시미어 치마. 무채색의 정갈함이 얼마나 섹시한지 보여줬다(⑨).

금요일 밤을 물들인 김재현 디자이너와 톱 모델들. 왼쪽부터 윤진욱, 안재현, 김재현 디자이너, 홍지수, 고소현, 아이린, 송해나, 진정선, 김진경 씨. 쟈뎅 드 슈에뜨 제공


김현진·김현수·김범석 기자 brigh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