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어묵 팔며 영업 익힌 27세 정희석 씨,백년초 농사 지으며 유통 깨친 26세 정재엽 씨,휴대전화 판매점 운영하며 경영 터득한 26세 김락현 씨…
1일 정식 입사한 KT의 ‘달인’ 신입사원 13명이 근로계약서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주현 황보미 김영현 김장후 최용배 백상화 김락현 씨, 뒷줄 왼쪽부터 조동혁 김동근 조대성 정재엽 정희석 맹진호 씨. KT 제공
KT는 지난해 8월 스펙을 전혀 보지 않고 특정 분야의 경험과 전문성만으로 신입사원을 뽑는 ‘달인(達人) 채용’을 도입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유통 및 영업 달인 9명, 소프트웨어 개발 달인 2명, 정보보안 달인 2명이 첫 합격의 주인공이 됐다. 하나같이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별난 궤적의 지원자들이 뽑혔다.
석 달간의 교육을 마치고 1일 정식 직원이 된 KT의 달인 신입사원 13명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올레캠퍼스에서 만났다.
이들에게 ‘스펙 호구조사’부터 해봤다. “해외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다녀온 사람 몇 명이죠?” 한 명뿐이었다. “워드 자격증 같은 거 딴 사람은?” 역시 한 명이었다. 토익 점수가 아예 없는 사람도 6명이나 됐다.
남들 취업 준비하는 걸 보고 불안했을 텐데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준비하지 않은 것인지 물었다. 영업 달인으로 뽑힌 정희석 씨(27)는 이렇게 태연히 답변했다. “저는 이벤트 사업을 하다 입사했습니다. 좋아하는 일에 열심히 도전하다 보니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더라고요. 오라는 데가 꽤 많았어요. 그런데 저더러 오라고 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펙 같은 건 전혀 궁금해 하지 않더라고요. 진짜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라면 스펙 따윈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정 씨는 제주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붕어빵과 어묵을 팔고, 졸업 후에도 2년 동안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면서 사회 경험을 쌓았다고 했다. 답변이 당돌하다 싶어 ‘돌직구’ 질문을 던져봤다. “이벤트 사업으로 그렇게 잘나갔다면 뭐 하러 대기업에 입사했나요. 월급도 많지 않을 텐데요.”
“사업을 하면서 내가 만들어 얻는 경험은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큰 규모의 회사에서 한번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온 거죠.”
○ “스펙 대신 쌓은 경험은 자신감의 원천”
이들은 스펙을 만드는 대신 경험을 쌓으며 크고 작은 성공을 접한 것이 자기의 가장 큰 무기이자 자신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대기업 지원자치고는 많은 나이인 ‘장수생’ 백 씨는 면접을 치르면서 합격할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는 회사가 정해 놓은 인재상에 맞는 지원자를 찾지만 달인 채용에선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면접관을 설득했습니다. 면접관이 갖고 있는 모범 답안을 입사지원자들이 맞히는 식이 아니었던 겁니다.”
또 다른 영업 달인 정재엽 씨(26)도 집 안의 ‘노는 땅’을 이용해 3년간 백년초 농사를 지은 경험이 취업에 가장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그는 군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모은 1200만 원을 투자해 백년초 농사를 지었지만 판로(販路)를 찾지 못해 고전했다.
고민 끝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해 400여 명의 고정 고객을 확보했고, 제품도 백년초 분말이나 과실주 판매에 그치지 않고 원액 판매로 차별화하면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정 씨는 “백년초 사업을 하면서 돈 버는 재미, 사람 만나는 재미를 알게 됐다”며 “회사 생활에서도 이런 경험이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발로 뛰면 취업의 기회는 많아
보안 달인으로 입사한 황보미 씨(25·여)는 고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중국에 가 살면서 런민(人民)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보안 전문가가 된 것은 우연한 기회와 성실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친구들과 채팅을 하다 한국인 개인정보 판매가 만연한 현실을 경험했다. 한국의 보안 문제가 중국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생각에 중국어와 보안기술을 함께 갖춘 전문가가 되기로 했다. 국내 보안업체 중국지사에 취직한 뒤 선배들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보안분야 지식을 쌓았다. “1년차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중국 내 악성코드 동향 일일 보고서를 만들어 회사 인트라넷에 올려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의 경험을 인정받아 KT에 보안 달인이라는 이름으로 입사까지 하게 된 거죠.”
대학에서 멀티미디어를 공부하다 보안 달인으로 입사한 조대성 씨(30)도 보안전문가가 되고 싶어 스스로 활로를 찾은 사례다. 그는 무턱대고 보안 관련 협회 사무실을 찾아가 인사하고 조언을 들었다. 세미나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직장인 선배들이 귀찮아하며 상대도 안 해줄 걸로 알았는데 하나같이 친절히 대해주시더군요. 그분들이 제 멘토가 됐고, 그들의 조언을 받아 과거엔 생각지도 못했던 보안 전문가 직업을 얻게 됐습니다. 원하는 취직 분야가 있다면 그 분야를 찾아가 보세요. 기회가 널려 있습니다.”
○ “우리는 CEO”
달인 채용으로 뽑힌 13명 중에는 창업을 해 자신이 직접 최고경영자(CEO) 노릇을 해본 이가 많다. 13명 중 4명이 창업을 경험했고, 3명은 사장도 해봤다고 했다.
휴대전화 판매, 시계 장사, 부동산 중개 등 여러 사업을 해봤다는 김락현 씨(26)는 “입사 후 마케팅 현장교육을 받았는데 CEO 역할을 해본 경험 덕분에 업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며 “‘내가 CEO’라는 생각이 나의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영업 달인인 최용배 씨(31)도 “행정고시 수석을 했다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는데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더라”라며 “우리는 공부는 못해도 강한 독립심으로 일을 잘해내는 실무형 인재”라고 말했다.
엄청난 스펙을 갖추고도 취업하기 어렵다는 요즘 세상에 용감하게 자기 인생을 살면서 일자리를 얻은 달인 신입사원 13명과 두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면서 ‘이들 중에서도 장차 KT의 CEO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