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광장/김병종]어떤 치유의 길

입력 | 2013-04-06 03:00:00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서울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있는 강용주 원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광주에 내려간다. 그가 대표로 있는 ‘광주 트라우마 센터’ 일 때문이다. 강 원장은 5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해맑은 미소가 소년 같은 동안의 의사이다. 얼핏 보면 세상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듯한 부잣집 도련님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이력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어마어마하다. 무슨 의학적 경력 때문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공부 잘하고 착실해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가 민주화운동이라는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삶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는 그 운명의 물살 앞에서 항거마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중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행돼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무려 14년을 복역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다시 대학에 복학해 졸업을 하고 의사면허증을 취득한 것은 마흔을 훌쩍 넘기고서였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토록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스럽고 온화한 그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득도한 종교인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그런 그의 안내로 광주 트라우마 센터를 찾은 것은 햇살이 유난히도 푸짐한 지난 목요일이었다. 차창으로 보니 거리는 봄의 생기로 넘쳐 있었고, 여인들의 옷차림은 더없이 화사했다. 거리 어디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의 아픔이나 어두움 같은 것은 느낄 수가 없었다. 어느덧 그 일은 신화와 전설처럼 시간의 저편으로 묻혀버린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적어도 광주 트라우마 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그곳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5·18민주화운동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10명이 넘는 부원들이 여기저기 방문객들과 상담을 하고 있었고, 예술치료와 물리치료 등이 함께 시행되고 있었다.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싶을 만큼 독특하고 전문적인 기관이었다. 참여 인원도 다양해서 정혜신 씨 같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있는가 하면 미술과 음악치료사에 인문학자까지 동원되어 있었다. 강용주 센터장은 5·18민주화운동이 30년이나 지났지만 오래전의 그 트라우마를 지금, 이곳에서 기억하고 치유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상처 입은 고통과 역사란 반드시 기억의 창고로부터 꺼내어져 치유 받을 때라야 비로소 참다운 삶이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픈 기억일수록 꺼내어 치료받을 때라야 비로소 건강한 삶이 이어진다는 것인데 부센터장 강문민서 씨는 개인 및 집단상담을 통해 회복된 사례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집단상담 참여자 중의 한 사람인 윤다현 씨가 했다는 말이다.

“친구와 저는 광주 학동 ‘배고픈 다리’ 뒤 큰 정자나무 아래에 저녁마다 모여서 노래 부르며 놀았습니다. 저는 배호의 노래를 참 좋아했고, 기타 치고 따라 부르면서 마냥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저는 수배자 명단에 있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서울 중앙시장에서 체포되어 합동수사본부, 군 보안대, 검찰로 넘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저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시간을 겪고 감옥에서 나오니 이번에는 이사한 곳마다 형사들이 따라붙었고 주변에서는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다고 한다. 그는 후유증으로 병원을 순례하고 30년 동안이나 정신과 약을 먹다가 트라우마 센터의 문을 노크했다는 것. 그가 했다는 마지막 증언은 왜 이런 기관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단적인 증언이 되고 있었다.

“…진실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없다고 느꼈는데 트라우마 센터에서 난생 처음으로 사람들이 저를 사랑해준다는 경험을 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어주고 얼마나 힘드셨냐고 응원해 주고 하니까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요즘에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더 괴로운 사람도 있었는데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도 해보게 되고, 앞으로는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생각도 하게 돼요. 이제는 증오, 분노, 이런 것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가끔 망월동에 있는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 친구 앞에 서면 그때 같이 죽을 걸, 왜 죽지 못하고 나는 살았나 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분들, 그 영혼들을 치유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피해자가 아니라 치유자로서의 삶, 이것이 제가 찾은 새로운 삶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 모든 아픔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일주일에 하루씩 병원 문을 닫고 광주로 내려오는 한 ‘바보 같은’ 의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오늘 광주의 한편에서는 시대의 아픔을 딛고 다시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