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
그러나 그곳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5·18민주화운동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10명이 넘는 부원들이 여기저기 방문객들과 상담을 하고 있었고, 예술치료와 물리치료 등이 함께 시행되고 있었다.
‘아! 이런 곳이 있었구나’ 싶을 만큼 독특하고 전문적인 기관이었다. 참여 인원도 다양해서 정혜신 씨 같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있는가 하면 미술과 음악치료사에 인문학자까지 동원되어 있었다. 강용주 센터장은 5·18민주화운동이 30년이나 지났지만 오래전의 그 트라우마를 지금, 이곳에서 기억하고 치유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친구와 저는 광주 학동 ‘배고픈 다리’ 뒤 큰 정자나무 아래에 저녁마다 모여서 노래 부르며 놀았습니다. 저는 배호의 노래를 참 좋아했고, 기타 치고 따라 부르면서 마냥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저는 수배자 명단에 있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서울 중앙시장에서 체포되어 합동수사본부, 군 보안대, 검찰로 넘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저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끔찍한 시간을 겪고 감옥에서 나오니 이번에는 이사한 곳마다 형사들이 따라붙었고 주변에서는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다고 한다. 그는 후유증으로 병원을 순례하고 30년 동안이나 정신과 약을 먹다가 트라우마 센터의 문을 노크했다는 것. 그가 했다는 마지막 증언은 왜 이런 기관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단적인 증언이 되고 있었다.
“…진실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없다고 느꼈는데 트라우마 센터에서 난생 처음으로 사람들이 저를 사랑해준다는 경험을 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어주고 얼마나 힘드셨냐고 응원해 주고 하니까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요즘에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더 괴로운 사람도 있었는데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도 해보게 되고, 앞으로는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생각도 하게 돼요. 이제는 증오, 분노, 이런 것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가끔 망월동에 있는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 친구 앞에 서면 그때 같이 죽을 걸, 왜 죽지 못하고 나는 살았나 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분들, 그 영혼들을 치유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피해자가 아니라 치유자로서의 삶, 이것이 제가 찾은 새로운 삶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 모든 아픔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일주일에 하루씩 병원 문을 닫고 광주로 내려오는 한 ‘바보 같은’ 의사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오늘 광주의 한편에서는 시대의 아픔을 딛고 다시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