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경제 양성화… 그리고 화폐개혁說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에 따라 떳떳하지 못한 ‘현금’을 대량으로 숨겨 둔 고액 자산가들이 긴장하고 있다. 사진은 2005년 경찰이 회삿돈을 횡령한 건설회사 직원에게서 압수한 현금 45억여 원. 동아일보DB
지난달 13일 오전 서울 강남구의 한 부동산컨설팅회사 강의실. 빽빽하게 들어찬 20여 명의 중년 남녀는 모두 수십 억 원의 여유 자금을 보유한 고액 자산가였다.
이들이 평일 오전 바쁜 일정을 제쳐 두고 강의실을 찾은 건 ‘화폐개혁과 부동산 투자’라는 주제로 열린 투자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회사 대표의 설명이 한 시간 반 남짓 이어진 뒤 참석자들의 질문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이 회사 관계자는 “최근 한국의 많은 부자가 화폐개혁 단행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화폐개혁을 미리 준비하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의 칼을 뽑으면서 ‘큰손’들이 음지에서 들썩이고 있다.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의 ‘히든 카드’로 화폐 액면 단위를 낮추는 화폐개혁을 단행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경기 침체에 따른 세입 감소로 새 정부가 복지공약 실행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도 한낱 ‘설(說)’에 불과하던 화폐개혁 가능성을 고액 자산가들이 믿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다. 특히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이나 화폐개혁으로 숨겨 둔 현금 자산의 규모가 노출되는 것을 우려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새 정부 들어 속속 관련 정책이 발표되고 있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큰손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아니다. 사채업자와 밀수업자에서부터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영세 자영업자, 고물상까지 세금을 회피할 소지가 높은 모든 경제 주체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 지하경제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에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조사 방식에 따라 국내총생산(GDP)의 10∼30% 사이에서 학자들마다 주장이 제각각이다. 대략 20%로 잡고 지난해 GDP(1272조5000억 원)에 대입하면 250조 원 정도 될 것으로 추산할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에는 전혀 이견이 없다. 지하경제는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래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인터넷 도박은 불법 사채업과 더불어 국세청이 주된 척결 대상으로 꼽는 지하경제의 큰 부분이다. 2011년 4월 경찰이 전북 김제시의 밭에서 찾아낸 50여억 원의 인터넷 도박 사이트 운영수익금 중 일부. 5만 원권 현금 뭉치들이 비닐에 싸인 채 밭에 파묻혀 있었다. 동아일보DB
“음대생이 1000만 원짜리 바이올린을 한 대 산다고 칩시다. 모든 학생이 그냥 낙원상가에 가서 돈을 내고 악기를 살까요? 아뇨. 학생은 교수에게 현금을 내고, 교수는 특정 메이커의 악기를 그 돈으로 사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세청의 한 당국자는 일부 악기 거래에서 이뤄지는 탈세 방식을 동아일보 취재팀에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악기상이 교수에게 ‘리베이트’를 주는 일이 생겨요. 악기 가격의 일부가 교수 몫으로 떨어지는 거죠. 이렇게 되면 이중(二重)으로 탈세가 발생합니다. 우선 수천만 원짜리 악기를 현금으로 거래하면서 악기상의 매출이 누락되고, 또 교수가 받는 리베이트도 소득으로 신고되지 않는 거죠.”
서울의 한 여자대학 음대를 졸업한 윤모 씨(30)도 “교수와 학생 간 수직적 상하관계에서 어떻게 학생이 담당 교수가 권하는 악기를 사지 않고 배기겠느냐”면서 “내가 다니던 학교 학생들은 모두 악기 가격의 10% 안팎을 교수들이 챙기는 걸로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세무 당국은 대학 외에도 고가(高價) 악기가 사용되는 일부 교회, 중고교 등에서도 이런 수법의 탈세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하경제는 크게 ‘불법’과 ‘합법’, 두 가지로 나뉜다. 이 분야의 세계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오스트리아 린츠대)의 분류. ‘불법’은 장물 및 마약 거래, 매춘, 밀수, 사기 등 사실상 범죄의 영역인 반면에 ‘합법 지하경제’는 자영업자들의 소득 탈루나 친척 간의 용돈 등 세무 당국에 잡히지 않는 평범한 국민의 모든 경제활동을 지칭한다. 말이 ‘합법’이지 당연히 내야 할 세금을 피해 가는 것이어서 이 중 상당수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한다.
모두가 다 아는 탈세 방법 “모르면 바보”
“그것도 몰랐어? 왜? 너희 세무사가 안 가르쳐 줬어?” 개업 변호사 김모 씨(37)는 얼마 전 사법시험 동기인 동료 변호사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가 알려 준 ‘절세의 팁’은 간단했다. 평소 주변 사람들이 받는 청첩장을 죄다 달라고 해서 모은다. 청첩장이 100여 장쯤 쌓이면 “내가 지난 1년간 영업상 이런저런 결혼식에 참석해 축의금으로 총 OOO만 원을 냈다”는 명목으로 접대비(손비) 처리를 한다. 단, 한 건의 손비 인정 한도가 20만 원인 점을 감안해 ‘A의 결혼식에는 10만 원, B의 결혼식에는 20만 원’ 식으로 적당히 ‘마사지’를 한다. 1년 접대비 한도가 최소 1200만 원이니 연소득에서 매년 그 이상 적게 신고하는 셈이다.
“예전에는 변호사들이 룸살롱, 고급 식당에서 접대할 일이 많아 청첩장을 따로 모으지 않아도 손비 한도가 금세 찼다. 요즘 젊은 개업 변호사들은 술 접대도 잘 안 하기 때문에 청첩장 모으기 효과가 쏠쏠하다. 나중에 세무 당국이 조사 나올 때에 대비해 청첩장을 기회 있을 때마다 친구들에게서 ‘수거’하고 있다.” 김 씨의 증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현행 소득세법은 사업상 지출하는 경조사비는 접대비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친척이나 친구에게 내는 축의금, 주변에서 양도받은 청첩장은 인정받을 수 없다.
문제는 세무 당국이 그걸 가려 낼 수 없다는 점이다. 관습상 한국의 장례식장, 결혼식장에서는 부의금, 축의금에 영수증을 발행하지 않는다. 또 수신인의 이름이 찍혀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 온 부고, 청첩장인지 알아낼 수 없다. 정부 당국자는 “작심하면 가족 관계는 조회할 수 있겠지만 지인(知人) 여부를 알아내는 시스템은 불가능하다”라고 털어놨다.
이 사례는 전체 고소득 전문직의 탈세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국세청이 2005∼2009년 10차례의 기획 세무조사를 통해 밝혀 낸 이들의 소득 탈루 규모는 약 3조6000억 원. 실제 총소득 대비 탈루율은 48%였다.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세원(稅源) 발굴은 잘만 되면 근로소득자의 조세 저항을 줄일 수 있고 정치적인 부담도 적어 역대 정권의 단골 국정과제였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탈세 수법 중 상당수는 현행 조세제도의 구멍을 교묘히 악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아버지(70)의 중소기업을 물려받기 위해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장모 씨(40). 여느 ‘2세 경영자’가 그렇듯 장 씨는 장래에 맞닥뜨릴 무거운 상속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음(福音)과도 같은 정보를 들었다. 차세대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모임에서였다. “장 사장. 그냥 시키는 대로 해봐요.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할 건 없어요. 다만 내가 얘기했다고만 하지 말고….”
장 씨가 들은 방법은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수법이었다. 순서는 이렇다. 우선 아버지가 아들 명의로 별도의 회사 B를 차린다. 아버지 회사 A는 개당 1000원에 다른 회사에 납품하던 제품을 B사에 반값인 500원에 넘긴다. B사는 500원만큼 차액을 챙기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A사는 기업 가치가 ‘반 토막’이 난다. 극단적인 형태의 ‘일감 몰아주기’다. 그러면 B사는 고사 상태에 빠진 A사를 헐값에 사들인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회사가 사실상 아들에게 넘어갔지만 아들이 내야 할 세금은 거의 없다.
그는 이 방법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회사의 기업 가치가 낮아지니까 내야 할 세금이 줄고, 아들 회사는 돈이 들어오니까 세금을 낼 재원(財源)이 생긴다. 물론 저가 납품을 너무 티가 나게 한꺼번에 하면 안 되니까 매우 천천히 해야 한다. 나는 10년 정도 보고 있다. ‘일감 몰아주기’인 것은 맞는데 이 정부는 대기업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는 몰라도 중소기업이 가업 승계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을 것이다.”
버스 승차권마저 소중한 탈세 재료
장 씨가 설명한 방법은 ‘모자 바꿔 쓰기’의 대표적 사례다. 실체(사람)는 그대로인데 외형(모자)만 바뀌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재래시장에서 30년 이상 도매업을 해 온 이모 씨(64·여)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사업자등록상의 대표 이름을 한 번은 직원 명의로 변경했고 얼마 전에는 조카 이름으로 또 바꿨다. 물론 실제 가게 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이 씨다.
“가게 수입(과세표준)이라는 게 서류상으로 매년 어느 정도씩은 올라야 구색이 맞지. 안 그러면 당장 ‘왜 과표가 줄었느냐’며 세무조사를 나와. 그러니까 우린 적당한 시점에 ‘꼬리 자르기’를 하는 거야. 허구한 날 과표를 올려 신고하면 세금만 늘어나니까. 실제 가게는 내가 계속하지만 중간에 명의가 바뀌면 그래도 추적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거든.”
이 씨는 “남들은 우리가 다들 차명계좌 쓰고 장롱에 현금을 뭉칫돈으로 갖고 있다지만 솔직히 영세 상인들 뒤져 봐야 얼마나 나오겠느냐”며 “신문 보면 고위 공직자들도 다 세금포탈하고 이중계약서 작성한다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소기업이나 시장 상인들의 탈세 방법은 대체로 동업자들 간의 사적인 모임에서 광범위하게 공유된다. 워낙 공통의 관심사다 보니 이런 자리에서는 으레 세금 문제를 얘기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예 세무사를 초청해 단체로 특강을 받는 일도 있다. 장 씨는 “한 번은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 세미나 모임에 나갔는데 세무사가 ‘여기 녹음하는 분 없죠? 그럼 믿고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다양한 탈세 방법을 읊어 줬다”며 “남들이 다 열심히 메모하는데 나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라고 털어 놨다.
일선 세무사들은 “한국의 지하경제는 문자 그대로 밑바닥까지 퍼져 있다”며 다양한 사례를 든다. 그중 하나가 ‘고속버스 승차권’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면 가끔 길바닥에서 버려진 차표를 줍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버리고 간 승차권을 모아다 출장비 정산을 한 뒤 증빙 자료로 보관한다는 것이다. 일부 업자들은 똑같은 이유로 고속도로 통행료 영수증도 수집한다. 운 좋으면 안면이 있는 톨게이트 안내원에게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신고 소득을 낮추기 위해 손비 금액을 고의로 높이는 행위를 자영업자들은 ‘경비를 떨어낸다’고 표현한다.
탈세 소재 중 별 가치가 없어 보여도 이윤이 ‘짭짤’하기로 유명한 것이 동(銅)스크랩이다. 동스크랩은 ‘쓰고 난 구리 조각’을 뜻하는 말로 고물상들이 이를 모아 중간 상인들에게 납품하면, 이들이 품질별로 분류·가공해 더 큰 제조업체에 납품하는 식으로 유통된다.
세금이 탈루되는 과정은 간단하다. 정상적인 거래에서는 물품을 매입한 업체가 부가가치세를 포함해 대금을 지급하면, 납품업체는 이를 신고하고 부가세를 납부해야 한다. 그러나 동스크랩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이른바 ‘폭탄 업체’들은 부가세가 포함된 대금을 받은 뒤 과세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고의로 부도를 낸다. 국세청이 뒤늦게 세무조사에 나서 탈세 사실을 적발해도 대개 ‘바지사장’만 처벌받고, 실제 업주는 부가세를 고스란히 챙겨 사라져 버린다. 정부는 연간 국내에 유통되는 동스크랩 20만 t 가운데 절반인 10만 t(약 9000억 원) 정도가 탈세로 이어지고 있다고 추산한다.
한국석유관리원 검사원이 1일 경기 수원시 장안구의 한 주유소에서 지하 저장탱크의 맨홀 뚜껑을 열고 석유가 진짜인지 검사하고 있다. 최근 주유 건(gun)을 조작해 가짜 석유와 정품을 섞어 팔다 적발되는 사례가 늘어나자 석유관리원은 탱크에서 직접 석유를 채취해 가짜 여부를 판정하고 있다. 수원=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양성화의 주된 표적, ‘암흑가의 지하경제’
“깨!”
단속반원의 지시가 떨어졌다. 아스팔트를 깨는 건설장비가 이내 콘크리트로 덮인 석유 저장탱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유기에서는 분명 가짜 석유가 나왔는데 저장탱크 어디서도 가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땅속 어딘가에 ‘몸통’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 단속반은 지하 깊숙이 묻힌 저장탱크를 통째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나오면 당신네가 이거 다 물어낼 거야?”
주유소 사장의 고함을 뒤로 하며 1시간쯤 콘크리트를 파헤치자 수상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이 잔뜩 낀 밸브였다. 뚜껑을 열고 내시경을 밀어 넣어 내부를 들여다봤다. 단속반은 경악했다. 가로, 세로 3m가 넘는 거대한 벽이 2만5000L 규모의 거대한 저장탱크를 갈라놓고 있었다. 탱크 절반에는 정품을, 나머지 반에는 가짜를 채워 넣은 뒤 컴퓨터 조작으로 심야와 주말에 팔았던 것이다.
경기 안성시 일죽면 38번 국도변의 K주유소. 차로 북적여야 할 주유소는 노란색 비닐펜스로 둘러싸인 채 흩어지고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만 나뒹굴었다. 올 2월 단속에 걸린 이곳은 결국 ‘2년 영업정지’를 맞았다.
가짜 석유는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지하경제 양성화’ 대상 1호 목표다. 탈루 규모로 보나, 유통 규모로 보나 가짜 석유는 국내 최대의 지하경제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유통된 가짜 석유는 3억7700만 L가 넘는다. 쏘나타 630만 대의 연료통을 가득 채울 수 있고, 2만 L짜리 탱크로리 차량을 일렬로 세우면 서울∼강릉 간 거리(183km)에 이르는 양이다. 업자들이 이렇게 빼먹은 세금은 연간 1조7000억 원이다.
가짜 석유가 성행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남는 게 많기 때문이다. 정품 휘발유에는 L당 917원의 세금이 붙지만 용제(溶劑·시너)와 톨루엔, 메탄올 등을 섞은 가짜는 각 원료의 10%인 부가가치세만 내면 된다. L당 700∼800원이 고스란히 업자에게 떨어지는 셈이다.
정부 당국과 조세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새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의 무게중심을 일단 ‘합법’보다는 ‘불법’ 쪽으로 잡은 듯하다. 이들은 비록 적발하기는 힘들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한번 제대로 양성화하면 엄청난 세원을 잡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국민의 세금 탈루를 잡아내는 것처럼 비칠 경우 정치적 부담이 커지는 것도 이유다.
경기 부천시에 있는 중소기업 직원 K 씨는 보증을 잘못 서 3년 전 7000만 원의 빚을 떠안았다. 원금과 이자 상환에 매달 170만 원씩 쏟아야 하니 생활은 갈수록 쪼들렸다. 이내 그에게 어둠의 유혹이 찾아왔다.
“성공하면 두둑이 후사하겠소.”
K 씨는 자신이 수입하는 중국산 전자부품 박스더미에 가짜 비아그라 박스 1, 2개를 끼워 넣어 달라는 밀수 제안을 받았다. 가짜 비아그라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는 K 씨도 몰랐다. 공급부터 포장 유통 통관 도소매까지 점조직으로 구성된 데다 연락은 대포폰으로, 거래는 심야에 주로 했다. 한번 성공하니 현찰 다발이 K 씨의 손에 쥐여졌다. 그가 개당 1000원에 들여온 가짜 비아그라는 국내 성인용품점, 유흥주점 등에서 1만 원에 팔렸다. 밀수품에 세금이 매겨질 리 없다. 그렇게 그가 들여온 가짜 비아그라만 총 57만 정(錠). 으슥한 다리 밑이나 대로 갓길에 ‘성인용품’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파는 약들의 정체다. K 씨는 지난 달 상표법 및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지난해 관세청에 적발된 불법 통관 규모는 총 4439건. 금액으로 환산하면 6조5249억 원에 이른다. 1년 새 6000억 원이나 늘었다. 관세청은 밀수, 탈세, 불법 외환거래 등 세관 업무와 관련된 ‘지하경제’만 연간 47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밀수의 전통적인 양대 수법으로는 이른바 ‘커튼치기’와 ‘심지박기’가 꼽힌다. 컨테이너 앞부분에 정상 수입물품을 커튼처럼 쌓아 놓고 그 뒤에 밀수품을 숨겨서 들어오는 게 전형적인 ‘커튼치기’ 방식이다.
‘심지박기’는 좀더 진화한 수법이다. 컨테이너 전체에 정상 화물을 쌓아 놓고 그 안에 밀수박스 1, 2개를 박아놓는 식이다. 현금 다발이나 금괴, 마약 등이 이런 방식으로 들어온다. 지난해 4월 부산본부세관은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온 직물 원단 컨테이너에 93만8800달러를 담은 사과상자가 끼워져 있는 걸 적발했다. 금괴 밀수는 더 기상천외하다. 운반책 10여 명을 몽골로 데려가 소시지 모양으로 특수 제작한 금괴를 항문 속에 숨겨 입국하다 걸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지하경제의 ‘막장’이다. 이렇게 들어온 금괴는 국내에서 재가공돼 세금 한 푼 안 내는 지하경제의 유통망으로 흡수된다.
“단속? 잠시 숨어 있으면 될 뿐”
지금은 사채시장 단속이 강화돼 간판을 내놓고 영업하는 사채 사무실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검은돈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지난해까지 명동 사채시장의 ‘전주(錢主)’ 밑에서 일했던 오지환(가명) 씨를 만났다. 그는 “강남으로 많이들 갔다고 하지만 명동은 여전히 기업들의 돈줄을 쥐는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며 “예전에는 단순한 기업 어음 할인이 대세였는데 요즘은 주식담보대출(주담)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유상증자나 채권 발행을 해야 하는데 ‘구멍가게 회사’들이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저축은행 몇 번 돌다 보면 결국 우리를 찾게 됩니다. 보통 50억 원에서 많게는 100억 원도 나가는데 이자는 6개월에 30% 정도 합니다. 회사 상태가 더 안 좋으면 50%가 넘을 때도 있죠. 우리도 신용평가는 은행 못지않아요. 은행은 컴퓨터 시스템으로 하겠지만 우린 인적 네트워크가 우선이죠. 일단 (명동) 시장에 언제 누구한테 돈 빌리러 나왔다는 소문이 나면 그때부터 모두 뒷조사를 시작해서 회사 사장 사생활까지 다 알게 된다고요.”
사채시장에서 전주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들은 피라미드 식 점조직으로 구성돼 있어 브로커들에게 하청과 재하청을 반복한다. 사채 전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면 연결되는 사람은 열에 아홉은 진짜 사채업자가 아닌 ‘깃털’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전주들은 자신의 명의가 아닌 여러 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래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기업들을 상대로 하는 돈놀이에서는 한 건에 수십억 원의 탈세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가령 50억 원을 빌려 주면 이자로 6개월에 15억 원(금리 30%)을 벌고 세금은 당연히 내지 않는다. 채무자가 상환 능력이 없으면 담보로 잡은 주식을 처분하기 전에 시세조종 세력을 끌어들여 주가를 뻥튀기해 처분하고 이자로 벌 돈의 몇 배의 이득을 보는 일도 흔하다. 일부 업자는 담보로 잡힌 주식을 넘어 회사 경영권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오 씨에게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구호는 5년에 한 번씩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어 온 말이다. “어차피 지하경제라는 것은 거래 행위를 했을 때 잡히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이 시끄러운 때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잠시 숨어 있는 것이죠. 세상에 두 손 들고 세금 제대로 내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파내려고 하면 더 숨고, 더 교묘한 방법을 찾아내게 마련이죠.”
이런 거대한 스펙트럼의 지하경제를 정부는 앞으로 5년간 성공적으로 뿌리 뽑을 수 있을까. 현진권 한국경제연구원 사회통합센터 소장은 “지하경제 척결은 도덕적으로는 우월한 정책이지만 매우 어렵고 코스트(비용)가 따르는 일”이라며 “지지도가 10%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지하경제를 바로잡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일 것인지 지도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현장의 반응은 아직 회의적이다. 자영업자들이 주된 고객인 충남지역의 한 세무사는 “벌써부터 고객들한테 (소득금액 계산에 적용하는) 기준경비율을 적당히 잘 맞춰 달라는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며 “잠시 ‘모자나 바꿔 쓰면서’ 숨죽이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다들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기업은 이미 사회적 감시를 많이 받고 세무조사 시스템도 어느 정도 갖춰져서 나올 게 많지 않아요. 중소기업이나 영세 자영업자는 뒤져 봐야 세상 시끄럽기만 하고 행정력만 낭비할 수 있죠. 고소득 전문직이 제일 문제인데 이들 이익단체의 정·관계 로비 능력이 어디 만만한가요. 지하경제 양성화,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 직후 구권 화폐를 새 화폐로 바꾸기 위해 서울의 한 은행 앞에 모인 인파. 당시 정부는 지하자금을 산업자금으로 전환하기 위해 화폐개혁으로 회수된 자금을 은행에 예금하도록 한 뒤 일부만 새 화폐로 바꿔줬다. 동아일보DB
“한마디로 경제에 대한 큰 충격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전혀 고려할 수 없습니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13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최근 지하경제를 없애기 위해 화폐개혁 얘기가 나온다”는 의원의 질의에 한 대답이다. 이날 현 부총리의 답변은 너무나 예상 가능했다는 분석이 많다. 화폐개혁은 정부가 개연성이 있다는 신호를 조금만 줘도 시장의 불확실성을 엄청나게 키울 수 있는 ‘인화성’이 큰 소재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단호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액 자산가나 부정한 돈을 보유한 이들은 금 등 실물자산에 대한 투자, 해외투자를 확대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만에 하나 정부가 갑작스럽게 화폐개혁을 단행한다면 돈을 신권(新券)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감춰뒀던 현금자산이 고스란히 포착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세계 역사상 화폐개혁이 임박하거나 이에 대한 소문이 돌 때마다 해당 국가에서는 자국 화폐를 제외한 다른 자산의 투자가 급격히 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금, 부동산, 달러화 등 실물·외화자산이 주된 ‘피난처’다.
한 시중은행의 프라이빗뱅킹(PB)센터 관계자는 “불법이긴 하지만 해외 미신고 계좌를 이용해 해외 부동산을 사들이면 재산을 감출 수 있다”며 “부자들 중에는 ‘지하경제 양성화’ 등에 불안감을 느껴 해외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달러나 금 투자 시장에서도 화폐개혁을 우려하는 자산가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포착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월 말 개인 외화예금은 38억6000만 달러(약 4조3000억 원)로 전월보다 6000만 달러 늘었다. ‘골드바(금괴)’ 투자 역시 크게 늘어 신한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월평균 200kg가량이었던 골드바 판매량은 올 들어 2.5배인 500kg으로 급증했다. 금융종합소득과세의 강화에 따라 절세(節稅) 효과를 노린 투자가 대부분이지만 화폐개혁에 대한 불안감으로 ‘금 사재기’에 나선 자산가들도 섞여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달러나 금 투자 열풍은 화폐개혁이 공론화됐던 2004년에도 나타났다. 화폐개혁이 이뤄지면 그 후에 물가가 오르는 일이 많은 만큼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달러, 금의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특히 달러나 금은 무자료 거래가 적지 않아 고액 자산가들이 재산 규모를 감추는 데 활용될 소지가 있다.
한 금 거래업체 관계자는 “최근 서울 강남권에서는 골드바를 사려면 1, 2주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라며 “골드바는 부동산과 달리 정부에 따로 신고할 필요가 없어 현금 대신 보유하거나 자녀에게 증여하려는 목적으로 사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화폐개혁이 ‘히든카드’될까
경제전문가들은 최근 정부가 내놓은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만으로는 새 정부가 계획한 복지재원 조달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부터 자산가들 사이에서 화폐개혁에 대한 우려가 커진 것도 이 대문이다. 화폐개혁을 단행하면 은행을 통해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탈루된 현금소득이 정부의 레이더망에 포착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그만큼 지하에 묻힌 자금을 끌어내고 세수를 늘리는 데 화폐개혁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하지만 정작 정부와 한은 내에서는 화폐개혁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원화의 단위가 너무 커졌다는 점에서는 필요성이 있지만 ‘지하경제 양성화’를 목적으로 화폐개혁을 하는 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은은 2002년 박승 전 총재 취임 직후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추진했다. 당시 한은은 2008년 1월부터 1000원을 1환으로 바꾼다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세웠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됐다.
한은이 정부와 정치권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은 화폐개혁으로 인한 이득이 비용보다 크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은 연구에 따르면 화폐를 교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최대 1조 원 미만에 그쳤지만 전산시스템 교체 등 금융회사와 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최소 수조 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됐다.
한은 관계자는 “회계시스템 교체, 가격표시 변경, 가격혼란 등 계산이 불가능한 부분까지 합하면 실로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다”며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효과는 적고 불편함과 비용은 크다는 것이 정부의 반대 이유였다”고 말했다.
특히 화폐개혁에 필요한 기간을 고려하면 새 정부가 이미 화폐개혁을 준비하고 있다 해도 박 대통령의 임기 내에 마무리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화폐개혁을 위해 화폐단위 변경과 액면가치 절하비율을 결정하고 기존 화폐를 대체할 새 화폐 도안 선정, 새 화폐 제작에만 적어도 2, 3년이 걸린다는 것. 여기에 기존 화폐를 신화폐로 교체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한은이 2006년과 2007년 1만 원권 등 3종의 신권 화폐를 발행한 뒤 기존 화폐의 80% 정도를 교체하는 데 1년 반가량이 걸렸다. 화폐단위를 완전히 바꾸는 전면적 화폐개혁을 한다면 신·구권 화폐 교체에만 2년 안팎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정부 관계자는 “과거 한은이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때도 화폐개혁을 완료하는 데 5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봤다”며 “설령 새 정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해도 임기 내에 효과를 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화폐개혁의 효과도 의견 엇갈려
화폐개혁이 지하경제 양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이냐는 것. 일각에서는 지하경제의 ‘큰손’들이 이미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거나 금 같은 현물로 관리하고 있을 개연성이 커 현금자산만을 대상으로 하는 화폐개혁으로 이들을 잡아내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자칫 막대한 비용을 치르는 화폐개혁을 단행하고서도 지하경제의 ‘깃털’을 잡는 데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50년 8월과 1953년 2월, 1962년 6월 등 모두 세 차례의 화폐개혁이 있었다. 6·25전쟁 중이었던 1950년에는 당시 유통되던 조선은행권 화폐를 찍어내는 북한군의 경제 교란행위를 막기 위해, 1953년에는 세수 부족으로 인한 재정적자를 메우려는 목적으로 이뤄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듬해 단행된 1962년 화폐개혁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산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됐다. 미국은 물론이고 당시 한은 총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정도로 비밀리에 추진됐던 당시 화폐개혁은 화폐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10환을 1원으로 교체하도록 했다.
당시 정부는 화폐개혁 발표 일주일 안에 모든 기존 화폐를 은행에 예금하도록 하고 일부 생활비 인출을 제외한 나머지 예금을 동결하는 ‘초강수’를 뒀다. 부정축재자나 화교들이 감춰둔 현금을 끌어내 산업자금으로 쓰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국회에서는 전체 통화량의 절반에 육박하는 1000억 환가량을 화교들이 갖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예금봉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는데도 당시 회수된 부정축재자나 화교의 지하자금 규모는 크지 않아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폐개혁 후 은행에 반환된 구권 화폐는 화폐발행액의 96%로 대부분이 회수됐지만 1억 환 이상을 신고한 건수는 7건, 액수로는 12억 환에 그쳤다. 1년 전 군사혁명정부의 부정축재처리위원회가 환수한 부정축재액이 42억 환이었던 것에 비하면 초라한 실적이었다.
물론 2005년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한 터키는 화폐개혁 이전에 국내총생산(GDP)의 40∼60%에 이르던 지하경제 비중이 2011년에 33.2%로 축소되기도 했다. 이철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터키의 지하경제 축소는 리디노미네이션의 직접적인 효과라기보다 그전부터 진행된 고액권 발행 등 물가 안정책의 영향이 컸다”며 “현재 한국과 2005년의 터키는 경제 상황에 큰 차이가 있어 비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지하경제 양성화 외에 경기부양이나 화폐의 대외적 위상 강화 등을 위해 화폐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화폐개혁이 이뤄지면 장롱 속 현금을 끄집어내 경기회복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원화의 교환가치가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도 화폐개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정근 아시아금융학회장도 “한국경제의 규모가 커졌는데도 1962년 화폐단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며 “변수가 많은 과제지만 현재 물가가 안정화돼 있다는 점에서 고려해볼 만한 정책”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유재동(팀장)·이상훈·문병기·박재명·유성열·김철중 기자 jarrett@donga.com
▶ [채널A 영상]‘지하경제와 전쟁’ 국세청, 사상 최대 세무조사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