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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스티브 잡스 같은 창조인은 ‘톨레랑스의 품’에서 태어난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입력 | 2013-04-08 03:00:00


“기술과 지식은 늘었지만 삶의 지혜는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그는 “삶의 본질은 아픔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그는 여전히 ‘청춘’이었다. 24세 젊은 나이 ‘우상의 파괴’로 등단한 이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인’ 등 숱한 저서를 남기며 ‘시대의 지성’으로 불린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79·이화여대 학술원 명예석좌교수).

그가 최근 ‘80초 생각나누기’(전 3권)란 책을 출간했다. 삶의 철학과 지혜를 짧은 에피소드로 풀어낸 이 에세이집은 두 달여 동안 5만여 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여든을 바라보는 그가 마치 아이들 동화책 같은 책을 펴낸 이유는 뭘까.

그는 “창조경제, 창조경영 등 ‘창조’란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 사회는 창조력의 빈곤과 갈증을 겪고 있다”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사고의 폭과 시각을 넓혀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주무부처 장관조차 제대로 답을 못하는 ‘창조’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또 ‘힐링(healing)’이 화두인 요즘 사회에 대해 어떤 진단과 처방을 내릴까. 3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선생께서 생각하시는 창조란 무엇인가”라고 첫 질문을 꺼내자 그는 ‘창조인’이라는 개념을 앞세웠다.

“창조는 전 국민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창조인’을 알아보는 교육과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지. 백락이 천리마를 알아보는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사교성도 없고 취직도 못했던 사람이지만 그 재능을 알아본 주변에서 도와줘 클 수 있었다. 과거 우리나라 물리학회 같은 데에서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아인슈타인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고 쫓겨났겠지. 스티브 잡스도 훌륭하지만 더 훌륭한 것은 잡스의 재능을 알아본 회사 임원들이다. 우리에게는 ‘창조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인을 알아볼 안목을 가진 사람과 사회분위기가 없었던 것이다.”

고통 인내하는 삶의 본질 가르쳐야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톨레랑스(관용)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고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다. 당시 세상과 맞지 않으니까 창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동시대에서 다 인정한다면 그것을 창조적이라고 말할 리가 없다. 이런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아는 톨레랑스가 필요하다. 창조는 관용적인 사회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최근 논란이 됐던 고위층 인사의 경우에도 관용을 적용해야 하는지 묻자 그는 ‘각오의 결정’이란 단어를 썼다.

“엄격한 잣대로 평가를 하되 어느 정도 선에서 끊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계의 성능을 테스트하는 기계가 있을 때 이 테스트 기계가 정확한지 알기 위해 검증을 해야 하지만 이걸 끝도 없이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말 낙마해야 할 사람도 있겠지만 너무 높은 잣대를 적용하기보다 조금 관대한 사회가 될 필요가 있다.”

―또 신간을 내셨는데. ‘80초 생각나누기’에 담긴 뜻은 뭔가.

“트위터 등 단문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위해 80초 동안에 생각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책 제목을 왜 ‘80초’라고 했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 8자를 눕혀 보라. 무한대(∞)의 기호가 되지 않는가. 짧은 순간에 무한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지속 가능한 우리의 미래가 누워 있는 것(무한대라는 뜻)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지성에게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이 궁금해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아픈 것 같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참는 존재다. 아픈 것을 참는 게 인생이다. 근데 요즘은 이 참는 교육이 없어졌다. 다들 아프다고만 해서 아픔을 덜어주려고 하지만 그것을 참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참아야 한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에서 더 낫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삶은 고통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근데 지금은 전부 아픔을 덜어주려는 행동만 한다. 참을성 없이 아픔을 덜어주려면 끝없이 베풀어줘야 하는데 한도 끝도 없다. 인간이란 게, 삶이란 게 본래 어떤 것인지를 알려줘야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도 있다.

“기성세대 역시 아파하는 젊음을 겪고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의 젊음에는 아픔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픔을 참고 극복하는 고진감래(苦盡甘來) 정신이 있었다. 그 힘이 있었기에 그래도 이만큼의 풍요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고통을 견디는 교육이다. ‘힐링’이란 말이 유행하는데 한 사회의 창조력은 행복과 유토피아에 대한 꿈이 아니라, 모진 고통과 그것을 참고 견디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흔한 말이지만 ‘진주는 병든 조개의 아픔 속에서 태어난다’ 하지 않던가.”

―인내 외에도 어떤 교육이 더 필요한가.

“사람을 만드는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도덕은 본래 인간에게 잠재된 것을 꺼내는 것이다. 선천적인 것을 꺼내줘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잠재적인 내면은 놔두고 지식적인 가치만을 애들에게 주입한다. 그래서 세상이 안 바뀐다.”

진짜 복지는 돈 아닌 ‘측은지심’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를 들어 지금 복지가 화두다. 그런데 복지를 경제학으로, 자본주의 사회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나. 안 된다. 이웃에 대해, 사람에 대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는 사회만이 진정한 의미의 복지사회를 이룰 수 있다. 이웃이 밥을 못 먹으면 밥이 안 넘어가는 마음이 있어야 진짜 복지가 이뤄진다. 그렇지 않으면 세금으로 남의 돈 걷어 나눠주는 것밖에는 안 된다. 기부나 자선이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측은지심에서 나오는 사회, 그것이 진짜 복지사회고 교육이 할 일이다. 오죽하면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사랑 경제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겠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책장에 비치된 해외 석학들의 관련 서적을 일일이 보여주며 ‘사랑 경제학’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동네에서 홍수가 나도 극복이 되는 데가 있고 아닌 데가 있다. 그 바탕에 애정이 있느냐 없느냐 차이다. 경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생명체라면 모두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마음이다. 서로간의 애정이 없으면 경제학이 존재할 수 없다. 케인스는 ‘경제는 법칙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통계 경제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인간의 심리가 경제의 기본이 된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시스템, 과학적인 것만 강조하다 보니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전멸했다.”

그의 조언이 젊은이들에게 향했다.

“우리가 왜 돈을 벌고 취직을 하는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먹고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 근데 좋은 집, 차, 출세 같은 것은 다 수단이다. 목적이 아닌데 목적이 되어 있다. 정말 좋아하는 것을 미치도록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가 탈고한 뒤 타이프를 바다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 마음의 100%를 다한 글을 썼다면서 말이다. 그런 순간을 한 번이라도 느낀 사람과 아닌 사람은 다르다. 이상주의가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물고기를 잡았을 때처럼 파닥 파닥거리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돈이 많고 출세를 해도 생의 주변에서 산 사람과 중심에 들어간 사람은 다른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아픔을 견디고 그 위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정작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고 갈등과 분란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에코 체임버(echo chamber·에코 효과를 만들어 내는 방) 효과라는 것이 있다. 공명실이나 목욕탕에서 노래를 부르면 훨씬 크고 잘 부르는 것 같잖은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인터넷, 트위터 등을 하면 이것이 증폭돼서 진리,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고 남의 소리가 안 들린다. 지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것이 대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주로 모이지 않는가. 다른 생각이 낄 틈이 없거나, 끼면 엄청난 공격을 받는다. 기술의 발달로 폐쇄된 공간에서 남의 말을 안 듣는 자기들만의 집단이 자꾸 생기고 커지니 갈등과 분란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기술과 접촉은 많아졌지만 오히려 ‘끼리끼리’문화가 팽배해 있다.

“‘우리’란 말이 재미있는 게 말하는 사람들만의 ‘우리’가 있고, 듣는 사람까지 포함한 ‘우리’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남인가’ 할 때는 남을 배제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고 쓸 때는 모두를 포함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갈등이 많은 것도 남을 배제한 ‘우리끼리’만 넘치기 때문이다. 기호가 맞는 사람들만 모이는 인터넷에서 나와 자신과 다른 생각이 넘치는 거리로 나올 필요가 있다. 길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려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 그런 소리가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디지털 시대에 일종의 아날로그적 사고와 행동이 결합돼야 한다고나 할까.”

인터뷰가 시작된 지 2시간이 넘었는데도 그는 물 한잔 마시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입가에 침조차 고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 지도층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한 것 같다.

“생각이든 행동방식이든 남과 공유할 수 없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결국 망한다. 과거 비디오테이프 시장에서 소니의 베타맥스는 여러 기술적 강점이 많았지만 호환성이 강한 VHS에 밀려 망했다. 개인도, 정당도 마찬가지다. 서로 의견이나 생각을 공유할 수 없다면 실패는 뻔한 것이다. 자기에게만 관대하다는 것은 여론이나 남의 말을 안 듣는다는 것과 같다. 남과 호환이 안 되니 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국사회, ‘우리끼리’만 넘쳐 불통

―평소 문화, 인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민주화든 산업화든, 경제·정치적 성공이든 문화가 바탕이 되고 충족되지 못하면 서로 상충돼 충돌요소가 될 수 있다. 문화는 모든 것을 수용해 아우르는 용광로이자 이를 통해 인간의 공감을 부르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군위안부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지만 이것은 머리띠를 두른다고, 또 외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전 세계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일제의 만행을 그린 작품이 있다면 다르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 ‘쉰들러 리스트’처럼 말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나치 만행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지 않나. 이런 작품 하나로 더이상의 왈가왈부가 필요 없지 않은가. 일본이 아직도 딴소리를 하는 데는 중국이나 우리가 이런 작품을 못 만들어냈기 때문도 있는 것 같다.”

세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이라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돼지계산법’이란 용어가 튀어나왔다.

“돼지 형제 10마리가 강을 건넌 뒤 세어 보니 계속 9마리뿐인 거야. 그래서 한 마리가 죽은 줄 알고 우는데 행인이 세어 보니 10마리가 맞았지. 모두 자기를 빼고 센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그렇다. 누구를 욕하거나 비난하는데 항상 자기는 빼고 이야기한다. 행복도 ‘돼지계산법’만 안 하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다. 자기는 빼고 남의 눈에 든 들보만 보니 못마땅하고 싸움이 나지.”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