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를 이념도 지도노선도 없는 단순폭발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60년 4월 19일 경무대(현 청와대) 앞 모습이다. 부상당한 시위대를 동료들이 옮기고 있다. 동아일보DB
그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환쟁이는 가난하다’는 말을 청소년 시절부터 이골이 나게 들어 그림과 학문의 길을 병행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고민하다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의 꿈은 장차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다.
“그때 미학과는 지금처럼 인문대학 소속이 아니라 미술대학 소속이었다. 집에서는 공대나 의대를 원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가 좋았다. 부모님은 화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대학교수가 되면 안정된 밥벌이도 되고 취미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원 원주)중학교 다닐 땐 여러 번 도(道) 미술전람회 같은 데서 입상도 하고 특선도 했다. 어느 전람회에선가 ‘미학개론’(김태오 저)이라는 책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중학교 땐 어려워서 읽을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서울 중동)고등학교 때 우연히 집어 들었다. 그때도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파 보면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3 때이던 어느 날, 고교 1년 선배가 학교로 찾아와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서울대 미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선배 말이 ‘미학 공부가 재미있다’면서 나더러 ‘관심이 있으면 미학과에 들어오라’고 적극 권했다. 그날로 서점에 가서 미학 책을 여러 권 사다 읽었다. 번역서도 별로 없던 시절이라 원서로 읽어야 했다. 점점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중동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김지하. 김지하 씨 제공
그날 김지하는 새벽 기차를 타고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길이었다. 모처럼 주머니에 돈도 두둑해서 서울에 오면 늘 그랬듯 당시 광화문에 있던 범문사로 직행해 책 몇 권을 사들고 외가(外家)로 향했다. 외가는 흑석동 국립묘지 근처에 있었는데 이날이 마침 그가 외가 더부살이를 청산하고 학교 근처인 성북동에 얻어둔 자취방으로 짐을 옮기는 날이었다. 그는 흑석동에서 이불 보따리를 들쳐 메고 버스를 탔다.
버스가 중앙대 입구에 멈췄을 때였다. 갑자기 무수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물결쳐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지하는 놀라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실정, 부패,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달 전인 2월 28일 경북고 대구고 경북여고 학생 1200여 명이 교내에서 시위를 하다 도청 앞까지 진출한 것(2·28대구학생의거)이 도화선이 된 학생 시위는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 선거가 있던 날, 폭발하고 말았다. 개표 결과는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963만3376표로,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833만7059표로 당선(국회보)이 확정되지만 투표소마다 사전투표, 기권자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선거가 횡행했다. 표의 95∼99%까지 조작되어 나온 곳도 속출했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조차 최인규 내무장관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국민의 분노는 4월 19일 크게 폭발했다. 서울 시내 2만여 명의 대학생, 고등학생, 시민들이 현역 정치인들의 불신임과 재선거를 요구하면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청와대의 옛 명칭)를 향해 행진했다. 고향에서 올라와 성북동 자취방으로 이불 보따리를 옮기던 김지하는 바로 이 시위대와 마주친 것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짐을 내팽개치고 시위대에 합류할까 하는 마음이 잠시 들긴 했지만 나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나는 4·19를 ‘이념도 지도노선도 없는 (단순한) 폭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위대를 뒤로하고 달리던 버스가 시청 앞까지 왔다. 시청 앞에도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청사 앞 연단 위에는 학생회장단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올라가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있었다. 김지하의 회고다.
“‘더이상 못 간다’는 버스 운전사 말을 듣고 이불 짐을 메고 내렸다. 성북동 집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시위대들이 보건 말건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안국동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대 중에 내 얼굴을 알아보고 손짓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미술대학 친구들이었다. 나는 뚱한 표정으로 인사도 받지 않고 지나쳤다. ‘그냥 너희들이나 (데모)해라’는 마음이었다.”
김지하는 “‘반동이 오면 또 싸운다’는 그 친구의 말이 훗날 내 삶을 평생 따라다닌 화두가 될 줄 그땐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아버지 얼굴이 스쳤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혁명에 실패했던 아버지, 국군에 자수하고 굴욕감에 양잿물을 마시고 허연 거품을 뿜으며 헛소리를 하던 아버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던 그 아버지의 얼굴이 그날 김지하를 짓눌렀다. 4·19와 맞닥뜨린 그날이 김지하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기자는 물어보지 않고도 잘 알 것 같았다.
시위대의 함성을 뒤로하고 착잡한 심경으로 자취방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내린 저녁이었다. 김지하는 구멍가게에서 사온 빵을 씹어 먹는 것으로 저녁을 대신하고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당시 몰입해있던 월터 페이터(1839∼1894·근대 영국의 위대한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문학가 및 평론가. 평생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냄)의 ‘르네상스’ ‘규범 미학’ 같은 책을 집어 들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시위대를 폄하하면서 행동에 나서지 않은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긴 했지만 어찌 심적 갈등이 없었겠는가.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든 밤, 운명의 폭풍이 빠른 속도로 그의 인생을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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