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문의 인력거꾼 김 첨지에게 오랜만에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80전을 벌어 모주까지 한잔 걸치고 달포 넘게 기침을 하는 아내에게 줄 설렁탕까지 사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설렁탕 국물을 먹고 싶다던 아내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김 첨지는 죽은 아내의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1920년대 하루살이 인력거꾼을 그린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의 줄거리다.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현대의 김 첨지가 대리운전 기사들이다. 운 좋으면 하루에 대여섯 번 ‘콜’을 잡아 10만 원을 번다. 그렇지만 회사 수수료 20%를 떼고 보험료 등을 내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6만 원 남짓. 돌아올 길이 막막한 ‘오지 콜’을 잡으면 하루를 공친다. 운이 더 나쁘면 술 취해 주먹을 휘두르고 여성 기사를 접대부로 착각하는 ‘손’(손님에서 ‘님’을 빼고 부르는 기사들의 말)을 만나기도 한다.
▷최근 한 대리운전 기사가 배우 이지아 씨를 태우고 억대 수입차인 마세라티를 운전하다가 순찰차를 들이받았다. 보험 한도 3000만 원을 넘으면 나머지 수리비는 대리 기사가 물어야 할 판이다. 외제차라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위험 부담은 훨씬 크다. 도시경제학자인 리처드 플로리다에 따르면 도시화는 의사 변호사 같은 고임금 서비스 직종과 이들을 통해 돈을 버는 가사도우미 운전기사 같은 저임금 직종으로 일자리를 양극화한다.
▷1990년대 등장한 대리운전은 도시화와 마이카 시대, 음주문화가 만든 신종 저임금 서비스업. 음주사고를 방지하고 외환위기 이후 서민 일자리를 만든 순기능도 있다. 전국대리기사협회는 대리운전 기사를 15만∼20만 명 정도로, 하룻밤 이용객은 50만∼60만 명쯤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아직 관련 법률이나 표준 요금조차 없다. 기사 권익과 소비자 안전을 위해서라도 법의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 오늘 밤도 수십만 명의 대리운전 기사가 진짜 ‘운수 좋은 날’을 바라며 거리를 누빈다.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