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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이 번역한 ‘테스’ 73년만에 다시 나왔다

입력 | 2013-04-10 03:00:00

비극적 운명 백석 작품세계 영향… 특유의 토속적인 문장 곳곳 번뜩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백석은 천재 시인이자 뛰어난 번역가였다. 러시아어에도 능통해 1950년대에는 북에서 수많은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했다. 동아일보DB

1940년 출판된 백석 역 ‘테스’(왼쪽)는 표지는 사라졌지만 본문은 훼손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동호 교수는 편집과 고증을 거쳐 올해 3월 번역판(오른쪽)을 재출간했다. 서정시학 제공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1912∼1996)이 번역한 ‘테스’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 1940년 9월 조광사에서 출간된 이래 73년 만이다.

백석의 ‘테스’는 오랫동안 풍문으로만 돌던 책이었다.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행방이 묘연했던 이 책을 찾아냈다. 그는 지난해 8월 서강대 로욜라 도서관에 소장된 초판본을 찾아냈고, 6개월의 고증작업을 거쳐 최근 출판사 서정시학을 통해 재출간했다.

영국 작가 토머스 하디의 1891년작 ‘테스’는 1926년 문학평론가 김기진이 일본어 번역본을 번안해 국내에 소개한 바 있지만 영문판을 완역한 것은 백석이 최초다. 최 교수는 “일본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한 백석이 이미 대학 시절 테스와 관련한 수업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테스’는 백석이 번역한 첫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테스’와 백석의 작품세계는 적지 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폭행을 당해 사생아를 낳고 이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아 처절하게 죽음에 이르는 테스의 비극적 운명이 백석의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해석한다.

재출간 번역서의 해설을 쓴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1948년 출간된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남쪽 신의주 버드나뭇골 박시봉 씨 집)’ 화자가 비극적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테스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며 “시 속의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라는 부분은 테스에서 나오는 문장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실제 ‘테스’를 번역하던 1940년경 백석은 여러 차례 사랑에 실패한 뒤 만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앞서 흠모하던 여인을 절친한 동료에게 빼앗기는 실연을 겪었고, 이후 자야라는 기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 역시 이루지 못했다. 백석은 부모의 강권으로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설상가상 몸담았던 신문사는 일제에 의해 폐간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불행을 겪은 백석이 테스의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번역서에서는 백석 특유의 토속적인 문장도 눈에 띈다. 예컨대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로 ‘그들은 이렇게 흥글흥글 걸어서 얼마동안 시간을 보냈다’고 표현했다. 강압적인 입맞춤의 느낌을 표현한 대목도 흥미롭다. ‘사나이의 입술이 그의 뺨에 닿을 때 그것은 마치 주위의 끝에 난 버섯껍질 같이 축은하고 미츳미츳하니 선듯하였다’라고 의태어와 의성어를 살려 문장의 읽는 맛을 살렸다. 현대적 번역은 ‘그의 입술이 근처 들판에 나 있는 버섯 껍질처럼 촉촉하고 매끄럽게 싸늘한 그녀의 뺨에 와 닿았다’로 돼 있다.

방 교수는 “백석의 테스 번역은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조선 문화의 방향성을 탐색하고 자기 길을 찾아가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