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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영의 따뜻한 동행]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입력 | 2013-04-11 03:00:00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꼭 와야 해. 그러지 않으면 산 벚꽃 다 져버려. 지금 아주 환상이야 환상!”

서울 종로구 홍지동 그분의 집에서 바라보는 인왕산 벚꽃은 하얀 뭉게구름 같다. 꽃구경을 재촉하는 이 전화는 올해도 꽃의 부름이 시작됐다는 신호다. 4월 중순에는 고창에서 선운사 동백꽃, 5월 초에는 부안에서 보랏빛 등나무꽃, 그리고 한여름에는 담양에서 명옥헌 배롱나무를 보러오라는 전화가 차례대로 걸려올 것이다.

꽃이 활짝 피었으니 같이 보자고 부르는 소리는 건조한 일상에 지친 나에게 죽비소리 같다. 퍼뜩 정신이 들면서 내 주변에 꽃보다 고운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한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달려가거나 때로는 미적거리다가 꽃이 다 지고 말아 내년을 기약하곤 하지만, 꽃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봄날에 사전계획 없는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대강 목적지를 섬진강 매화마을로 정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길을 잡아 정오쯤 변산반도에 이르렀다. 잔잔한 봄 바다를 끼고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절벽에 예쁜 카페를 발견하고 들어가니 커다란 유리창 너머 서해바다가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느긋하게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데 주인이 말을 걸었다. 부부가 이렇게 다정하게 여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했다. 마침 손님은 우리 부부뿐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점심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덕분에 우리는 현지인이 아니면 찾기 어려운 맛집에서 점심을 잘 대접받았고, 그 인연이 이어져 십년지기가 되었다.

첫날부터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에게서 이미 꽃보다 진한 향기를 맡았으니 다음 일정은 덤이었다. 섬진강의 줄기를 따라가며 매화와 산수유를 보았지만 그 여행에 대한 기억은 꽃보다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 가꾸어진 비밀의 정원을 구경한 것보다 훨씬 더 뿌듯하고 즐거웠다.

봄날에 길을 나서면 어디 간들 곱고 어여쁜 꽃을 보지 못할까. 그러나 고운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이와 함께하는 꽃구경은 특별하다. 기실 꽃에 취하는 게 아니라 나를 부른 이의 향기에 취하기 때문이다.

올봄에는 우리 집 마당에 목련이 피었다고, 우리 집 울타리에 찔레꽃이 피었다고 그것도 아니면 우리 집 화분에 난이 꽃을 피웠다고, 꽃을 핑계 삼아 그리운 사람을 청하는 멋을 부려보자.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과 마주하며 차를 우리면 어느 해 봄보다 향기로울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화살처럼 빠른 세월 속 짧은 봄날이어도 마냥 아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행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올봄에는 꽃 보러 오라는 부름에 지체 없이 달려가야겠다. 아니, 지금쯤 꽃이 피었느냐고 내가 먼저 안부를 물어야겠다.

윤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