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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종수]등산화, 코드, 국정철학 그리고 낙하산

입력 | 2013-04-13 03:00:00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예전에 공기업의 사장과 이사장을 선발하는 위원으로 두 번 참여한 적이 있다. 두 번 모두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무거웠다. 권력 주변의 인사들로 후보가 내정되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추천위원회 참여자들 과반이 이미 인사권자의 의중을 대변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고, 누가 이의를 제기해봤자 결정이 바뀔 듯한 상황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애꿎은 아내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도대체 이 나라에는 그런 중요한 자리의 인사를 할 때 사전에 내정 받은 사람 없이 공정하게 인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인사에 들러리 서지 않겠다고.

새 정부 들어 공기업 사장 인사가 논란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국정철학을 언급한 후 부총리,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금융위원장이 이어서 ‘국정철학’을 기준으로 굳히고 있다. 때맞춰 총리실 산하 공직복무관리관실이 공기업 임원에 대해 감찰을 시작하자 앞선 정권에 의해 임명된 인사들은 줄지어 사표를 내고 있다. 그들도 5년 전에는 ‘국정철학’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동안 많이 보아왔던 풍경이다.

새 대통령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공기업 인사에도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기대하는 우리에겐 아쉬움이 크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던 공기업 임원들의 유임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국정철학’을 넘어서는 인사기준과 방향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정철학 옆에 전문성을 양념처럼 첨부하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경험으로 볼 때 국정철학을 넘어서는 공공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전문성은 눈먼 어용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교체를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발전을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고, 국민의 지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새 정부가 국정철학으로 공기업 인사의 기준을 삼으면, 이 기준에 따라 임명된 인사들은 5년 후 낙하산부대로 분류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박근혜정부의 국정철학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과 무엇이 다른가? 두 정부는 모두 보수 이데올로기에다 동일 정당에 뿌리를 두고 탄생한 정권인데 말이다. 그냥 5년 후 낙하산으로 추락할 것을 감수하고라도 MB맨을 GH맨으로 교체하는 데 의도가 있는 것인가? 역대 정부에서 그랬듯 결국 국정철학은 현실적으로 정권의 탄생에 기여한 측근들의 논공행상, 그리고 총선에서 탄생하는 여당 주변의 낙천·낙선 인사 무마, 정부 부처 퇴직 공무원의 안식처로 변질되진 않을까?

이런 우려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새 정부의 ‘국정철학’에 의한 공기업 인사는 전두환 정권시절의 낙하산, 김영삼 정부하의 등산화 부대,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코드인사와 다를 것이 없는 실패를 반복하게 될 개연성이 크다. 그렇게 방치하기에는 우리나라의 공기업 규모와 중요성이 너무도 크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현재 295개의 공공기관이 있는데 이 중 30개 내외가 자산 규모와 자체 수입 비중에 따라 공기업으로 분류된다. 한국토지주택공사 수자원공사가 대표적인 공기업인데 이들의 빚이 어마어마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 하나만 해도 빚이 138조3900억 원에 이르러 부채비율이 467%에 육박한다. 상위 8대 공기업 부채만 합쳐도 324조 원에 달해 우리나라 전체 예산 342조 원과 맞먹는다.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신도시, 보금자리주택, 혁신도시 건설정책에 동원되고 수자원공사는 4대강 사업 시책에 동원되어 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낙하산 인사를 감시해야 할 감사까지도 유사한 국정철학과 배경의 소유자들이 내려와 앉아있으니 경영에 견제가 되지 않는다. 240개 공공기관에 재직 중인 감사 250명 중 118명(47.2%)이 청와대 등 정치권 및 정부 공무원 출신이다.

공기업은 정권 주변 인사의 안식처가 아니며, 정부의 빚을 은폐하는 은닉처도 아니다. 국가경제와 국민생활을 떠받치는 인프라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의 운영은 국정철학보다는 공공성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고 전문성을 겸비한 인사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현재의 외양만 멀쩡한 임원추천 절차를 개선할 대안으로 영국의 공공기관인사감독관(OCPA) 방식을 제안하고 싶다. 이 기관은 공공기관 임원 인사에 공공성과 능력을 최우선시하라는 사회적 임무를 부여받고 설립되었다. 모든 공공기관 임원추천 회의에 OCPA는 위원 일부를 추천할 수 있다. 일반 국민 중 지원자를 공개모집하여 취지와 관련 규정을 철저히 교육시킨 다음 인사위원으로 보내는 것이다. 비록 한 명일지라도 문제가 발견될 때 이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언론과 국회, 그리고 국민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때문에 효과는 크다. 좌우의 국정철학을 넘어 사회적 공공성과 역량 기준으로 공기업 인사를 단행하는 영국의 개혁 사례를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